사랑충전소

그 두 시간

M.미카엘라 2001. 12. 18. 03:10
새 글이 많이 늦어졌다. 집에만 있는 형편인데 왜 그리 바쁜지 모르겠다. 열흘이나 지난 사건을
이제야 글로 쓰려니 좀 김 빠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써야겠다.

열흘 전 그날 저녁은 좀 바빴다. 집에 온 남편과 두 아이에게 일찍 상 차려 밥 먹게 하고
나는 또 따로 저녁식사를 하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멀리는 아니고 아파트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나를 따라오겠다고 잠시 발을 동동 굴렀던 소은이에게서도 "엄마, 그럼 밥 먹고 오세요"하는
말을 가볍게 받아내고 마음 편하게 식당이 자리한 아파트 진입로 아래쪽으로 슬슬 걸었다.

참 이렇게 짧은 거리인데 기저귀 가방 같은 것 하나 안 들고 한껏 가벼운 기분으로 혼자
걷는 일이 왠지 어색하고 나 같지 않았다, 둘 다 아니면 꼭 하나라도 늘 내 몸에 붙어 따라
다니던 딸들 탓에 이게 어느새 영 어색한 행보가 되었으니 잠시지만 당황했다. 불이 켜진
집 쪽을 자꾸 뒤돌아 쳐다보게 되었고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아쉬운 맘이 새록새록했다.
밤 공기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쌀쌀함에 조금 더 걸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 같다.

커다란 방에 여자들만 스무 명 가까이 모였다. 내 기분이 가벼워서 그랬는지 모두 식구들
밥 챙겨줄 것 챙겨주고 나온 엄마들의 홀가분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즐거운 수다와 웃음,
그리고 준비하는 수고와 설거지 같은 마무리 걱정이 없는 맛있는 식사가 어우러진 '아줌마들의
저녁식사'는 1년의 피로를 한꺼번에 녹여낼 듯했다.

송년회나 망년회 이런 이름을 가진 모임도 아니었건만 시기도 시기이고 술도 한 잔씩 한
어른들인지라, 여세를 몰아 고 옆에 붙은 노래방을 가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코스였다. 시간은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따라가서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호기 좋게 두 번째로
불렀다. 이건 나이도 어린것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 같은 계산에서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남편은 지난밤을 완전히 새우며 시험 준비를 한 터라 분명 아이들보다 먼저 잠들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잠들면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던, 자기 몸을 타넘고 놀던 전혀 알지 못하는 어두운 잠귀를
갖은 남편이라, 그쯤 되면 깨어있는 아이들은 아빠 없이 단 둘이 노는 것과 다름없다고 봐도
좋다. 두 아이만 무얼 하며 놀고 있겠지 싶은 마음에 열 시가 가까워지니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열 시가 되었을 때 제일 어른께 둘러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앞에서 들으니 집은 조용했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가
나를 먼저 반기고 곧이어 소은이가 조금 핼쓱한 얼굴로 미소를 보일 듯 말 듯 나를 맞았다.
"엄마, 히니가 엄마 기다렸잖아요."
"응, 그랬어? 아빠는? 언니는? 다 화났어? 왜 안 나와보는 거지?"
"아빠하고 언니는 자요."
나는 소은이가 지어낸 말을 한다고 착각했다. 그 나이에는 지어낸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잠시 잊고….

그러나 방에 가보니 정말이지 두 부녀는 늘어지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금방 잠든 것이 아니라 아주 곤한 게 잠든 지 꽤 되었구나 싶었다. 나는 그때서야 소은이를
번쩍 안아서 꼭 껴안고는 안쓰러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세상에나! 아빠가 아무리 피곤해도 이럴 수가 있니? 우리 히니 혼자서 이렇게 놀게 내버려두게.
세상에! 그래, 안 울었어? 언니도 자고 엄마도 안 오는데 안 울었어? 안 무서웠어?"
"울었어요. 놀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여기 아팠어요"

아무도 제가 우는 걸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제 풀에 꺾여 울기를 그치고 그냥저냥 놀았던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꼬지지하고 어떻게 놀았길래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한쪽이
삐죽 위로 올라가고 잔머리가 빠져 나와 가관이었다. 나는 너무 기특한 생각에 소은이를 한참
안고 "아이고, 우리 작은딸, 그래, 울지도 않고 엄마 기다리면서 이렇게 까까 먹고 레고 가지고
놀았어?" 그러길 몇 차례 했는데, 그때마다 소은이는 우습게도 잊지도 않고 "울었어요, 침대에서
떨어져서" 이러면서 꼭 토를 달았다.

다음 날 남편에게 물으니 더 놀라웠다. 남편은 소미와 거의 비슷하게 잠들었는데 그 시간이
저녁 8시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소은이는 혼자서 두 시간 가까이 지냈다는 말이 된다.
내가 혹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서 노래방에서 지체했다면 소은이는 혼자서 더 놀아야 했을
것이다. 낮잠을 많이 잔 터라 쉽게 잠도 안 오고 얼마나 엄마가 목 빠지게 기다려졌을까.

생각하기에 따라선 아무 일도, 뭐 대단한 '사건'도 아닐 수 있다. 애가 다친 것도 아니고 잠기지
않은 현관문으로 나와 엄마 찾아 그 밤길을 헤맨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아주 잠든 아빠와
언니,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엄마를 기다리며 보낸 두 시간 동안 이 29개월 짜리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내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이거 호들갑이 지나치군' 해도 좋다. '의외로 과잉보호
엄마로군' 해도 토달지 않겠다. 나는 그 생각에 그냥 '짠-'해지고 말았다. 그 나이에 벌써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을 리 만무하고.

그런데 엊그제.
요즘 밥 먹는 게 영 신통치 않은 소은이와 마주한 점심상에서 또 반찬만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이리저리 달래다가 슬그머니 화가 나서 밥하고 안 먹을 거면 반찬도 먹지 말라고
아예 반찬그릇을 상에서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그대로 다리를 쭈욱 뻗고 퍼지르고 앉아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굽힌 채 울며 한다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아빠, 아빠, 히니 아빠! 엄마가 먹지 마래요. 밥 먹지 마래요. 아빠, 히니는 아빠 딸인데…"
'하이고 참말로! 누가 밥 먹지 말랬나? 반찬만 먹지 말랬지. 그래, 소은아, 아빠 딸 실컷 해라.
너 혼자 놀게 내버려두고 코 골면서 잔 아빠 딸 실컷 해라.'
속으로 이러기만 하고 더 이상 먹어라 마라 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파김치에
쓱쓱 밥 한 그릇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