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학교

풍수원의 초여름

M.미카엘라 2000. 6. 22. 15:42
1888년에 세워졌으니까 정확하게 112년쯤의 세월을 견딘 강원도 횡성에 있는 풍수원
성당을 다녀왔다. 집에선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데 여주를 막 벗어나서
강원도에 접어들자마자 바로 있었다. 여자 어른 아홉 명에 소미, 소은이, 6개월된
남자 아기 용록이가 이 나들이에 함께 나섰다. 용록이는 엄마가 선생님이라
돌봐주시는 분에게 방울처럼 달려서 간 것인데, 막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본
걸 생각하면 녀석이 너부데데한 것이 이쁘게 많이도 컸다.

대부분 자식들을 진작에 길러놓은 어른들과 함께 간 길이라, 지금 한참 힘든 때이고
외출도 자유롭지 못한 내 처지를 잘 알아주셔서 편하게 같이 다녀올 용기를 냈지
그렇지 않으며 이 더위에 어림도 없었다. 차편도 애어멈들 될 수 있으면 편
하라고 넉넉하게 준비해 주셔서, 나는 두 딸과 승용차 뒷좌석 전체를 온전히
차지했다.

이 단아한 옛 시골 성당은 붉은 벽돌로 지은, 높은 뾰족 지붕이 전체 높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양 건축물인데, 세월과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주듯 고풍스러움이
물씬했다. 유물관도 있고 신자들에겐 기도하는 곳이긴 하지만 뒷산으로 조붓
하게 난 오솔길을 오르는 맛도 좋았다. 이 성당은 기독교의 유산이긴 하지만
강원도 지방문화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불교 사찰이나 향교, 사당을
만나면 자연스레 한번쯤 둘러보는 것처럼 찾아도 좋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천주교신자이긴 하지만 어디 드러내놓기엔 부끄러운 점과 부족한 점이
아주 많다. 이러한 성당을 찾아서도 그 이국적인 맛과 고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바가 더 크지, 사실 깊은 신심으로 뻐끈한 감동을 느끼기엔 내 신앙심은 한없이
철없는 수준이다. 우릴 데리고 가주신 분들껜 죄송스럽지만 집을 벗어나 도시락
싸들고 소풍 나오는 기분에 들뜬 마음이 반은 훨씬 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넓은 성당 안은 마루바닥엔 의자라곤 한 개도 없고 양쪽 옆으로 낡았지만 깨끗한
방석만 많이 쌓여있었다. 소미는 신이 나서 뛰놀고 나는 못하게 하느라 진땀을 뺐다.
2층으로 된 조촐한 유물관을 둘러보고 나왔다.

성당 앞마당엔 아주 큰 느티나무 고목이 녹음과 그늘을 자랑하고 있었다. 며칠 후
큰 행사가 있다는데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오셔서 풀을 뽑고 청소를 하시는
빛이었다. 그 속에서 다소 젊고 검게 그을은 사람을 만났는데 뜻밖에도 본당
신부님이셨다.

느티나무 아래 들마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상치, 치커리 쑥갓, 풋고추에 겉절이 김치,
총각무 김치, 장아찌 등이 주를 이루었고, 예쁜 주먹밥을 해오신 분이 있었다.
소은이는 유모차에 앉아서 주먹밥 한 귀퉁이를 조금씩 뜯어주니 냠냠 잘도 먹고,
소미는 내가 안 챙겨줘도 잘 먹었다. 바람 때문에 단발머리칼이 밥 먹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은데도 쓱쓱 쓸어내며 잘도 먹었다. 이 햇볕과 시원한 그늘,
그리고 산들바람이 먹여주는 것 같았다.

다 먹고 들마루에서 내려오더니 똥이 마렵다고 했다. 요 며칠 변비로 고생 중인데
여기 낯선 화장실에선 성공 못 하겠다 싶었지만 데리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안 나와요"했다.
"소미야, 우리이 집에 가서 하자. 어제 산 요구르트 한 병 쭈욱 마시고 엄마가 배
마사지 해줄게. 그러면 똥들이 소미야 기다려 우리가 지금 나간다 그럴 거야."
"근데 왜 배가 계속 아픈 거에요?"
"응, 똥들이 나올 준비하느라고 소미 뱃속에서 많이 움직여서 그런 거야. 와! 우리
소미 이런 거 봤어?"
오디가 까뭇까뭇하게 많이 달린 아주 큰 뽕나무가 있었다. 다행이 화장실 아래 낮은
데서 자란 나무라 이 윗쪽에 서있는 내 손에 가지 몇이 닿았다. 오디를 따서
소미에게 건넸다.
"소미, <뽕나무 숲을 걸어요> 이런 노래 알지? 이게 바로 그 뽕나무고 이건 뽕나무
열맨데 오디라고 그래. 한번 먹어봐. 달콤해."
소미는 순순히 이 처음 보는 열매를 조심스레 맛봤다. 맛이 괜찮은지 두어 개를
더 먹는 동안 나는 한 웅큼 정도를 더 땄다. 생각 같아선 나무에 올라가 하늘과
조금 더 가까이 있어서 탐스러운 오디를 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눈으로만 먹고
돌아왔다.

돌아와보니 더 아쉬운 나무가 있음을 알았는데 우리 자리하고 앉은 느티나무 옆에
있는 큰 벚나무였다. 버찌가 까맣게 무진장 다닥다닥하게 달렸는데 한 개도 맛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어릴 때 우리 집 뒷산에 있던 벚나무에 기어올라가 입가가
시커매지도록 먹느라 내려올 생각을 안 하던 때가 생각났다. 엄마가 그때 나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무슨 가시나가 그렇게 나무에서 오래도록
안 내려왔느냐고 타박하시던 소리가 이 벚나무 아래 서있으니 막 생생히 들
리는 것 같았다. 엄만 그 때 쪽진 머리를 하셨는데.

들마루에선 이야기가 무르익고 내 육아일기를 보신 분이 하신 한 마디 말씀이
돌아오는 내내, 돌아와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를 골몰하게 만들었다.
"소미 엄마, 요즘 육아일기 보니까 점점 강도가 세지는 것 같은데."
딸들에게 하는 품이 점점 짜증 섞이고 거칠다는 뜻이셨다.
"네, 제가 요즘 몸이 너무 힘들다보니까 안 그래야지 하는데도 잘 안되네요."
그러니까 옆에 계신 분이 말씀하셨다.
"그러기 시작하면 참 더 힘들어지는데."
사실 요즘 반성을 거듭하고 있는 참인데 정곡을 찔린 셈이었다. 너무 급한 성격이라
뭘 잘 못 기다려주고 내 말대로 잘 안 되면 짜증이 나는데, 평소엔 잘 안 그러다가
몸이 피곤하면 그게 더욱 심해진다. 내가 소미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것만 본
사람들에게 이런 실상을 토로하면 "에이, 거짓말 마라" "에구, 소미 엄마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봐야 얼마나 낼라구. 그럼 그 정도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러면서 일축하니 더 할 말이 없다. 내게 있어서 문제는 그런 짜증과
거칠음이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강도에 있다는 점이다. 아이를 겁에 질리게
만들 때도 있으니.

이즈음 언니의 말이 생각난다. 엄마에겐 어떨 땐 사랑보다 한 수 위인 덕목이 있으니
그게 '인내'라고 했던 말 말이다. '성질을 죽이기' 내지 '너그럽게 참기'가 자식
기르면서 내가 평생 품어야할 화두라는 걸 다시 확인하며 풍수원 성당에서
오후를 보냈다. 이렇게 백 년 이상을 온갖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신자들을 보듬고
거두었던 이 오래된 성당에 견주면 내가 무에 그리 못 참을 일이 많단 말인가.
그렇게 내 마음을 다독였다.

풍수원의 초여름(아직 달력에서 보이는 날짜상)은 낡고 오래된 물건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정서, 그리고 너그러운 사랑과 아늑한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다. 소미도 그렇게
느꼈는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 풍두언 성당에서 참 재밌썼지이? 엄마, 우리 또띠(오디)도 먹었지이? 소미는
그거 참 마싰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