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법을 알려드립니다
이제 소미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한글 선생님이 오신다.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선생님 오시게 해달라고 날이면 날마다 노래를 불러댔는데 새해 들어서자마자 일찌감치 소원 성취한 셈이다.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받침이 없는 글자는 대충 비슷하게 읽고 간판이나 책제목 같은 것을 읽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저녁이면 그림이 곁들여진 한글카드를 한 손에 모아 쥔 채 제 아빠를 앞에 앉혀놓고 스피드 퀴즈를 낸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소미는 기상천외한 설명을 하고 남편은 어리버리한 표정에 연신 허허 웃으며 그걸 알아 맞춘다.
이제 떡국 먹고 여섯 살이 된 소미의 현재 수준이 이만 만하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자기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은 뙈놈들의 인해전술처럼 하나하나 끝없이 밀려오는데 이제 시작이고 갈 길은 멀다. 그러나 금요일이면 문 앞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니 그 즐거움과 설레임이 앞으로 멀고도 먼 공부와 학문의 길을 선선히 수월하게 열어주는 첫 단추 구실을 하길 빌 뿐이다.
사설이 길었다. 사실 오늘은 소미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소은이의 수준 높은(?) 일상을 그려 보이기 위해 소미의 현재 수준을 들먹였을 뿐이다. 소미가 더듬더듬 코끼리 다리 만지듯 글자를 익히는 중인데 2년이나 늦게 태어난 소은이는 벌써 그 아는 체가 100단을 넘어섰다.
우리 집 화장실 변기 뚜껑 안쪽에는 손바닥만한 스티커가 하나 붙어있다. 참 요즘도 변기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이런 게 붙어있나
싶게, 약화로 표현된 사람형상과 함께 자상하게 사용법을 일러둔 스티커였다. 그런데 한 2주 전쯤 소은이가 그걸 한참 쳐다보더니 이러는
것이었다.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스티커에 써있는 내용이 "여, 기, 변, 기, 에, 안, 즈, 세, 요"라면서 딱딱 끊어서 읽는 품이 아주 진지해서 더 웃겼다. 그 이후부터 소은이의 날카로운(?) 눈은 여러 가지 사양이나 사용법, 성분, 유통기간 같은 것이 잡다하게 써있는 어떤 물건이나 식품의 포장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음료수병: "엄마, '이, 거 마, 시, 세, 요' 이렇게 써있는 거예요."
참, 누가 먹는 건지 모르고 마시는 건 줄 모르나 말끝마다 '사용설명서'라고 읽는 품이 그런 식이다. 이번 설에 어머님과 시동생이 집에
왔을 때, 소은이는 삼촌하고 음료수를 먹으면서 또 그러는 거다. 시동생은 생각지도 않은 소은이의 그런 말에 너무나 의외였는지 "그래? 정말 그렇게 써 있어?" 그러면서 피식 소리내서 웃었다. 나는 부엌에서 뭔가를 하다가 '또 그 소리구나'하면서 킥킥 웃었다.
정월 초하루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고 외갓집에서 콧구멍에 휴지조각을 잘게 뭉쳐 밀어 넣고는 급기야 깊이 들어가는 사태를 맞이한 소은이. 다행이 조금 있다가 핑하는 소리와 함께 그 휴지 뭉치가 젖은 코딱지와 같이 나왔다.
안심하며 뒤처리는 오랜만에 만난 이모에게 맡기고 나는 방에서 슬그머니 나와버렸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급기야 사단을 낼 뻔한 소은이는 그날 저녁 눈가가 흥건히 젖게 이모에게 야단을 듣고 그 방에서 나올 땐 끽소리도 못하고 얌전해져 있었다. 소은아, 그 휴지 어디에 '이, 거, 콧, 구, 멍, 에, 뭉, 쳐, 너, 으, 세, 요'라고 써있었던 게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