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할머니 어린 이모
“에휴, 조카들 만나는데 이모가 좀 씻어야지.”
집에서 판판이 놀면서 하루 종일 세수 한번 안하고 내복 바람으로 지내기 일쑤인 소은이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이모 자리가 무섭긴 무섭군.
나는 마흔도 안 되었는데 벌써 손녀가 있다. 우리 소미와 소은이는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벌써 조카가 생겼고 형부도 있다. 나의 손녀이자 소미 소은이의 조카인 혜빈이와 수빈이는 이제 여덟 살과 여섯 살이다. 내 큰오빠의 딸, 그러니까 내 큰조카 숙경이가 꽤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다. 나는 보통보다 좀 늦은 나이에 첫아이를 낳았고 숙경이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바로 아이를 가져서 낳았는데 이 네 여자아이가 차례로 일 년에 한명씩 태어났다. 소미(97년생) 혜빈이(98년생) 소은이(99년생) 수빈이(2000년생) 순서다.
큰오빠가 엄마를 모시고 살았으니 숙경이와 나는 친정이 같다. 그래서 두 여자가 아이를 해마다 번갈아 낳아서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였으니 엄마가 돌아가신 그 방에서다. 4년 동안 해마다 한 달씩은 옥상 빨랫줄에 하얀 귀저귀와 배내저고리가 펄럭였고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나이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라도 엄연히 항렬(行列)이라는 게 존재하니 어린 아이들에겐 참으로 복잡다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 왜 할머니가 저렇게 젊어?” 나나 우리 언니들을 보고 수빈이가 하는 소리다. 우리가 고모할머니 아닌가. 소은이는 숙경이에게도 ‘언니’ 혜빈이에게도 ‘언니’ 그냥 그랬다. ‘이모’라고 불러라, ‘조카’라고 해라 했더니 그 중에서 가장 스트레스 많이 받는 가엾은 아이가 혜빈이었다. 소미에게 이모라고 하는 건 그래도 할 만한데 한 살 적은 소은이에게 이모라고 하려니 아이생각으론 ‘내가 왜?’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크게 운 적도 있었다.
우리들은 크면 다 알아서 하니 스트레스 주지 말자 하면서도 가끔은 웃으면서 이모다, 조카다 하길 여러 차례 했다. 그랬더니 최근엔 위계질서가 서서히 잡혀가는 눈치다. 수빈이는 완전히 소미 소은이에게 이모라고 부르고 소은이도 혜빈조카, 수빈조카, 혹은 “혜빈아”까지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혜빈이가 ‘소은이 이모’ 하는 소리를 나는 아직 못 들었다. 쉽지 않겠지.
뭐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크면 시키지 않아도 다 하려니 하니 지금은 바쁘면 “혜빈이 언니”하면서 달려가는 소은이 뒤통수 보는 일이 더 쉽지만 그냥 웃고 만다. 더구나 네 아이가 전혀 싸우는 일 없이 너무나 사이좋게 잘 논다. 엄마 49제 때문에 지난주에 집에 갔다가 만났는데 나와 숙경이는 할 일이 없었다.
“지난번에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가 애들 집에서 보는데도 뭐 볼 것도 없어. 난 그냥 놀았는데. 저희들끼리 잘 놀아. 밥하고 간식만 챙겨주면 돼.”
숙경이 말대로 우린 그날도 할 일이 없어서 앉아서 수다만 떨었다. 애들 오기 전에 한다고 새언니들과 가까이 사는 큰언니가 음식장만도 다 해 놔서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애들은 이방 저 방 뛰어다니는데 아직 그대로인 할머니(혜빈이 수빈이에겐 증조할머니겠다) 상청이 차려진 방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문 닫아 놓고 할머니 영정 앞에서 재잘재잘 깔깔깔깔 뭐가 그리 재미난지 그 재미난 이야기는 돌아가신 우리 엄마나 들으셨을지 모르겠다. 갓 낳은 저 네 아이들을 날마다 당신이 손수 씻겨 옷 갈아 입혀 옆에 재우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렇게 커서 서로 이야기가 된다고 수다가 한 바가지고 해맑은 웃음소리를 온 집안에 퍼뜨리니 엄마 탈상을 앞둔 집안 분위기 오묘묘해졌다.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모습이다 싶다. 아이들이 있으면 사는 소리가 난다. 밤에 한 방에서 자는데도 잠자리 위치로 한참 시끄럽다. 누가 누구 옆에서 자는가 하는 문제, 벽 쪽에서 자면 밀려나는 기분 때문에, 혹은 무서운 생각이 연상되어 한사코 싫어해서 조율하는 문제로 목소리가 컸다.
겨우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네 아이가 쪼로록 누워 잠든 방에서 잦은 기침소리가 났다. “누구지?” 그러면서도 숙경이와 나는 서로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문을 열고 보니 네 아이는 요가 두 개인데도 한 개는 휑하니 비워두고 다른 한 요에서 강아지들처럼 오글오글 모여서 잠들어있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었다. 난 혜빈이 수빈이가 소미 소은이와는 또 다르게 아주 귀엽고 예쁘다. 할머니 눈(?)으로 봐서 그런가.
“누가 기침하니? 소민가? 소은인가?”
그냥 혼자소리로 은근히 그렇게 물었더니 잠든 줄 알았던 소은이가 톡 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우리 혜빈 조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