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빵점 맞지 뭐!
M.미카엘라
2002. 2. 23. 11:20
"엄마, 이 소파가 이상해요. 쭈글쭈글해."
"그러게. 어디 아주 조그만 구멍이 났나보다. 에휴 벌써…"
이곳에 막 이사왔을 때 친구가 사서 보내준 어린아이용 비닐 소파 세트가 있다. 동그란
테이블이랑 하얀색, 하늘색 두 가지 색깔의 소파에 예쁜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말랑
말랑하고 폭신폭신해서 아이들이 앉아서 지내는 것은 물론, 가볍고 비교적 두꺼운 비닐로
튼튼한 편이라 온몸으로 이리저리 굴리고 올라타고 하면서 아주 장난감처럼 잘 가지고 놀던
가구(?)였다.
그런데 벌써 하얀색 소은이 소파가 이상조짐을 보인 것이다.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곳에
작은 구멍이 났는지 팔걸이와 등받이 쪽으로 시나브로 바람이 빠졌다. 엉덩이가 닿는 바닥
부분은 따로 공기를 넣어주게 되어 있어서 거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 난리를
하면서 놀더니 벌써…"하는 생각에 좀 화가 났지만, 작은 구멍은 야무지게 땜질할 묘안이
있었던 터라 소은이에게 구멍 찾아서 고쳐주겠노라고 말하고 일단락 지었다.
아, 그런데 그 말이 끝난 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 소은이!"
소미의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돌아보니 일은 벌써 저질러진 후였다.
소은이는 이미 가위로 쭈글한 제 소파의 팔걸이 부분을 '쑹텅쑹텅' 오리고 만 것이다.
등받이와 팔걸이는 완전히 바람이 빠져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으∼ 내가 못 살아. 못 참아
정말. 한번도 소파에 가위를 대지 않던 게 왜 하필…
쌩쌩한 바닥부분을 생각하면 버리기 아깝고 가위질한 곳을 보면 도무지 수습이 안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소은이에게 크게 야단야단을 했다. 이걸 버리고 나면 나머지 한 개
(비록 소미 것이라고 약속된 것일지라도)의 소파를 가지고 두 애들이 또 얼마나 싸울까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다 아파 왔다.
나만 말끄러미 쳐다보며 처분을 바라고 있던 아이 눈에서 급기야 눈물을 쏟게 하고, 소파는
바닥부분까지 마저 바람을 빼서 쓰레기통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등받이와 팔걸이는 깨끗이
오려내고 바닥만 벽 쪽에 놓아두고 앉게 해야겠단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금새 눈물을 그치고
제 언니와 뭐라뭐라 조잘대는 소은이의 천연덕스러움 앞에서 도대체 그러고 싶질 않았다. 나중에
하자하고 밀어두었다.
다 저녁에 그런 터라 나는 그쯤에서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보통
아이들 방은 소미가 많이 치우는데 워낙 많이 어질러져있어서 내가 함께 도왔다. 그런데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목각 강아지 인형을 집어드는 순간 으∼ 어느새 또……. 강아지 목에
길게 늘어져 끌고 다닐 수 있게 되어있던 초록색 줄이 '똑,똑,똑,똑' 끊어져 있지 않은가.
아까 오전에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예 더 이어서 쓰지도 못하게 목부분에 나무를 뚫고 박혀
있던 끈을 바싹 잘라놓았다. 뭐 국수를 만든 거라나? 좀 전에 있었던 사건에 연이어 소은이가
물고 났음은 말 안 해도 뻔한 노릇이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담부턴 안 그러께요"라는 말을
듣고 그만 두었다.
말없이 저녁준비를 뚝딱뚝딱 하는데 두 아이는 내 눈치를 보았다. 그것도 보기 싫은데 그날은
쉽게 헤헤거리는 게 잘 안 되었다. 한참 저희들은 저희들끼리 놀고 나는 나대로 부엌에서
어느 정도 진정하며 코다리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 아직도 화 안 풀리셨어요?"
소미가 슬그머니 와서 말했다.
"그래."
쪼르르 방으로 갔다.
"엄마, 아직도 화 안 풀렸어요?"
소은이가 제 언니를 따라 염치 불문 한마디 묻는다.
"그래, 화 풀리려면 아직 멀었어. 말 시키지 마."
한참 후 두 아이 다시 순서대로.
"엄마, 아직도 화 풀리려면 멀었어요?"
"좀 더 풀려야 돼."
"엄마 아직도예요?"
"그럼, 히니 땜에 얼마나 화가 났었는데."
코다리찜이 자글자글 끓었다. 이번엔 요것들이 아예 부엌 쪽으론 오지도 않고 제 할 일들을
하면서 소리만 쳤다.
"엄마 이제 쪼끔만 화났어요?"
"응, 쪼끔 남았어."
"엄마, 히니 땜에 화난 거 쪼끔 남았어요?"
"응"
코다리찜을 올려두었던 가스불을 껐다. 이번엔 소은이만 은근히 다가와 내 다리를 잡으며 물었다.
"엄마, 이제 다 풀렸어요?"
난 지독한 엄마다.
"아니."
"그럼 언제 풀려요?"
소은이는 내가 쓰레기 버리러 나가려고만 하면 저도 따라간다고 늘 복도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며 운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가 그럴까 싶은 계산을 했다.
"쓰레기 버리고 오면서 바깥바람 쏘여야 아주 풀릴 것 같애."
"네, 다녀오세요 엄마."
푸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아주 깍듯하게 받는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문을 여니 소은이는 내가 나갔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맞았다.
"엄마!"
(아주 나긋한 말투로)"왜에? 우리 히니 안 울었어?"
"엄마, 화 다 풀렸어요?"
"그으럼! 다 풀렸지."
"와아! 우리 엄마 화 다 풀렸다"
내가 한번 안아주려고 했더니 그대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우리 엄마 진짜 오래 화낸다 정말. 그치? 소은아!"
소미가 방에서 날 보고 하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면 뭐 그리 대단히 화낼 일도 아닌데 그냥 그날은 좀 애들 앞에서 오기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너희도 속 좀 태워봐라 할 양으로. 엄마가 철없게 구는 게 속이
상했겠지만 두고두고 고소하다.
난 가끔 나를 미성숙한 채로 두고 싶을 때가 많다. 철딱서니 없고 푼수 같고 그냥 막무가내이고
막돼먹은 짓을 하고 못되게 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욕구가 복병처럼 가슴에 늘 웅크리고 있다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니 참
나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를 때가 많다.
아이들은 가끔씩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바득바득 우기고 엄마의 약을 바싹바싹
올리면서 끝까지 덤빌 때가 있다. 달래다 달래다 안 되면 그때부턴 기싸움이 되는 건데 난 이런
때 절대 안 진다. 아이한테 이기는 게 뭐 자랑일 것도 없지만 애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나를
한계상황으로 몰고 갈 땐 나도 그냥 내 멋대로 오기가 발동한다. 맘먹고 그렇지는 않지만 그 순간
딱 엄마로서의 이성을 버린다. 속물처럼 아예 아이를 약올리거나 그대로 울려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든다.
'그래. 어디 해 보자 한번. 에미가 뭐 성자냐? 군자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자도 군자도
아닌 불쌍한 여자다. 너희들은 그걸 알아야 해. 나중에라도.'
엊그제 저녁에도 언니와 전화로 그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는데 언니 역시 그날 조카와 그
비슷한 형편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아이한테 한 푸닥거리하고 마음이 진정이 안돼 전화를
건 게 분명했다. 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성의 여왕'이다. 여간해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잘 그렇지 못하니까 그게 좀 얄미울 정도로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좀 차가울 정도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이 뛰어난 언니가 그날 그
이성을 잘 요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듯 보였다. 그럼 난 뭔가?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언닌 훌륭해. 그만하면 정말 본보기가 된다구. 엄마도 사람이야. 그걸 인정하면 좀 편해져.
그 정도도 안 하면 어디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아이들 야단해놓고 처음엔 전전긍긍 마음이 미어지더니 이렇게
배포가 커져버렸다. 아이들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면 '그냥 빵점 맞지 뭐' 해버리는 거다.
요즘은 정말 겨우 내내 집안에서만 머물며 두 아이 치다꺼리에 지친 나를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고맙다. 눈물도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다 잊고서는(이게 커서까지 상처가
될 문제라면 곤란하겠지) 엄마 뭐 먹을 것 주세요, 저거 꺼내 주세요 한다. 그 천연덕스러움이
얄미운 것은 잠깐이다. 아이들은 그 천연덕스러움으로 다시 나를 안심시키고 나를 위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