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공주들의 놀이터

M.미카엘라 2005. 2. 25. 04:00
 

이제 꽉 찬 두 달이 되어간다. 집안이 완전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지도. 밖에서 놀 만하면 추워지고 놀 만하니까 또 추워진단다. 이제 아이들은 집안을 놀이터화 하는데 달인이 되어 봄은 다가오는데 혹시 밖에서 노는 방법을 잊은 건 아닌가 은근히 걱정될 때가 있다. 날씨가 조금 푹해서 나가 놀라고 해도 그냥 마냥 집에서 노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니 억지로 떠다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두 달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 잘 논다, 정말 별 걸 다 하면서 논다, 정말 별 걸 다 만들어서 논다, 정말 재미있게도 논다 뭐 그런 생각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데, 어제만 해도 소미와 소은이는 소미친구 하현이까지 와서 오후 4시부터 놀기 시작하여 중간에 하현이가 돌아가고 나서도 7시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놀이에 열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었고 해줄 필요도 없었고 아이들은 3시간 동안 집안을 홀랑 엎어놓았지만 나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말 한마디 하게 하지도 않고 놀았다. 물론 소미와 소은이 둘이는 오전에도 그렇게 놀았다.

 

나는 놀랐다. 우리 애들이 잘 노는 건 알았지만 어제는 그 하이라이트였기 때문에 나는 방학 내내, 그리고 지금 맞고 있는 봄방학까지 돌아본 아이들의 놀이와 놀이터화 된 집안에 대해서 한 마디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의 (좀 살을 보태 말하면) 신기에 가까운 놀이기술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이 다음에 세상 그 모든 딸들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거창한 예감까지 하면서, 집안 꼴이야 어디 갔던지 흐뭇하고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마음 깊은데서 옹달샘처럼 솟아 오른다.

 

보통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만화캐릭터 놀이가 시작이다. 한동안은 <꼬마 마법사 레미>에 빠지더니 요즘은 그 주니어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베리베리 뮤우뮤우>에 빠져서 소은이는 날마다 마법봉 만들고 ‘뮤우뮤우 카페’ 메뉴판에 일일이 손으로 그린 차와 케이크, 아이스크림을 오려서 세워놓을 수 있게끔 만들어서 나를 손님으로 불러 앉혀놓고 이것저것 먹인다.

 

그리고 식지 않는 영원한 인기절정의 공주놀이가 있다. 한복 입은 조선시대 공주, 드레스 입은 서양 공주까지. 지난 가을 어머님이 성당에서 바자회 때 나온 중고드레스 하나를 가져다 주셨는데 다 쳐지고 늘어진 프릴레이스에 색깔도 누런 것을 서로 입겠다고 날마다 싸워서 내가 골머리를 앓다가, 바쁘지만 솜씨 좋은 내 언니에게 제안을 했다. 내가 재료비를 댈 터이니 언니 조카들 드레스 좀 만들어 달라고. 가진 게 저것뿐이니 저거라도 입겠다고 날마다 싸운다 하니 쉽게 허락했다. 그야말로 피아노 발표회에 나갈 일도 없고, 어디 신랑신부 앞에서 화동(花童)으로 설 일도 없는 두 아이는, 가히 여자아이들에겐 ‘꿈의 옷’이라고 불릴 만한 예쁜 드레스를 그냥 순수 놀이복으로 입으라고 이모로부터 선물 받았다. 아이들의 자지러질 듯한 기쁨은 안 봐도 훤하시리라.

 

웃긴 건 그 다음이다. 미련 없이 전에 입던 늘어진 원피스를 버릴 줄 알았더니 그건 공주의 ‘평상복’으로 쓸 것이니 버리지 말란다. 공주는 평상복도 저런 거 안 입는다 했더니 그래도 막무가내로 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두 공주가 ‘의전용 드레스’가 생긴 이후 한번도 그 평상복 입는 걸 난 못 봤다. 도무지 새 드레스 옆에 걸려있는데 그거 나라도 입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새 드레스 싸가지고 이웃나라(?) 공주네 집에 놀러갔다가 그 애 엄마가 감탄하여 현재 언니에게 자기 아이 드레스를 주문해서 넣은 그런 솜씨의 작품이다. (같은 핏줄인데 내겐 왜 그런 재주가 없을꼬?)

 

엊그제는 드레스 입고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하길래, 그래! 공부가 놀이 같아야 즐겁게 잘 한다지? 싶어 허락을 했다. 미리 딱 차려입고 선생님 들어오시니 제비새끼들처럼 입을 맞춰 말했다. 놀랍게도 그것도 영어로.

“안녕하세요. 저는 소미공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은공주입니다."

서툴게 엊그제 배운 자기 소개말을 좀 바꾼 것이다. 근데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surprise!"하니, 소은이가 귓속말로 ‘엄마 서프라이가 뭐야?’한다. “응, 너무 예뻐서 깜짝 놀라셨대.” (크크... 공주마마, 아직 멀었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찬탄해마지 않는 놀이는 이제 시작이다. 시스템화 되어 있거나 분업화된 놀이가 그렇다. 역할이 서로 분명하지만 역할을 번갈아 하기도 하는데, ‘엄마아빠놀이’는 기본이고 거기서 벗어나서 더욱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방학 중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매일 한두 시간씩은 소미 친구인 하현이와 서로의 집을 오가며 노는데, 소미, 소은이, 하현이 이 세 여자아이의 놀이는 어떤 땐 비디오로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웃기고 즐겁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 도서관놀이: 책을 분류해서 진열하고 대출증을 만들어서 도서관 사서, 책 빌리는 사람들로 나누어 한다.


* 은행놀이: 돈을 저금하고 받고 통장에 기입한다.


* 투표놀이: 기표소를 만들고 투표용지를 만들어서 무슨 당, 무슨 당 쓰고 선관위 직원이나 유권자 역할을 나누어서 한다. 투표소가 어찌나 친절한지 엄마 따라온 아기에게 사탕까지 준다.


* 앵콜노래방 놀이: 내 방에 있는 스탠드를 가져다 켜고 아쉬운 대로 사이키 조명 흉내를 낸다. 트라이앵글부터 온갖 악기란 악기는 다 가져다 놓고는 동요 테이프 잔뜩 쌓아놓고 그 중 하나 골라서 틀어놓고 악기 연주하고 노래하고 점수 매기고 팡파르까지 입으로 다한다. 방밖으로 나와서 ‘엄마, 너무 재밌어 죽겠어요’하는 소미 이마에 땀이 촉촉.....


* 커리어우먼 놀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건축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여군도 있다)이 차를 마시러 한 모임에 자리했는데 대화를 나누다가 핸드폰을 받는 모양이다. 그런데 집에 있는 남편에게 자기는 일 때문에 바쁘니까 아이들에게 저녁 차려주고 재우라고 말하는 걸 보고 놀랐다. 참고로 엄마인 나는 커리어우먼도 아니고 평소 애들에게 어른들 드라마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 마트놀이: 접시를 꺼내다가 슬라이스치즈나 과자 같은 것을 잘라서 놓고 시식코너도 만드는데, 오디오에 마이크 빵빵하게 연결해서 그거 들고 귀 아프게 호객행위도 한다. ‘새로 나온 치즈 잡숴보고 가세요. 뼈도 튼튼, 이도 튼튼해요...’ 나도 그거 참 많이 먹었다.


* 사무실 놀이: 이건 소미가 참 좋아하는데 자기 책상을 만들어서 진짜지만 망가진 컴퓨터 키보드 가져다놓고 일하는 책상을 훌륭히 꾸민 다음, 화이트보드 앞에 놓고 뭔가를 적어가며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상품설명회 같은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도 한다. 또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다가 플라스틱 파일 속에 파묻혀서 날마다 무슨 일을 참 열심히도 한다.


*수의사 놀이: 동물인형들을 데리고 서로 이웃끼리 자기네 애완동물 자랑하다가 강아지가 아프면 한 사람은 수의사 한 사람은 고객으로 변신한다.


다 기억도 안 난다. 어떤 날은 오백 원 짜리 지점토 한 봉지씩 끼고 앉아 조용히 만들기만 하고, 어떤 날은 온통 색종이 쪼가리 난무하게 오리고 붙이고 또 오리고 붙이는 일만 한다. 또 어떤 날은 종이를 이렇게 저렇게 다 잘라 이어 붙여 동화책을 열심히 만들고, 어떤 날은 꾸깃꾸깃 실패한 색종이들이 뒹구는 사이로 쉼 없이 종이접기를 해댄다.

 

그런가 하면 먼지 풀풀 나게 활동적인 놀이에 열중하기도 한다. 둥근 침대 헤드부분 맨 위에 위태롭게 서서 천장에 두 손을 버티고 서는 묘기만 종일 연습하기도 하고, 서로 업어주기도 하고, 커플 체조도 하고, 고만고만한 덩치에 소미는 소은이 목마까지 태워 건들건들 다니니 나를 기함하게 만든다. 정말 무궁무진한 아이들의 놀이에 방안이 조용하다 싶으면 이젠 또 뭐하고 놀고 있나 슬그머니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우리 앞집, 윗집의 두 형제들, 네 명이다. 요 녀석들이 놀러 오면 여자아이들은 대환영을 하면서 이런 놀이에 끼워주려고 하는데 잘 놀지 못한다. ‘아줌마, 텔레비전 보면 안 돼요?’하거나 ‘아줌마, 레고나 꺼내주세요’하거나 잠시 껴서 놀다가도 간식 주면 그거 먹고 나서 ‘이제 집에 갈래요’ 이게 다다. 서로 돕거나 역할을 나눠서, 혹은 놀이 속에서 나름대로 정한 규칙과 예절을 지키며 하는 그런 놀이를 오래 하지 못한다. 내가 아들만 있는 우리 언니에게 이런 현상을 어찌 보냐 했더니 언니 왈, “남자 애들은 원래 그래. 같이 잘 놀 줄 몰라. 같은 방에서 놀아도 따로 놀 때가 더 많지. 커도 그래. 남자들은 놀 줄 몰라. 어떤 땐 짜증 나.” 그런다.

 

흐흐, 이것이 요즘 들어 회자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고 경쟁력이 아니겠나 싶다. 그 모든 동등한 기회 앞에서 여성들의 경쟁력이 날개를 단 듯 나날이 높아간다는 여러 매체의 소식을 접하며, 나는 바른 짝짓기인지 모르지만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어렴풋 그 연관성을 찾아본다.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그런 놀이 푹 빠져 땀을 뻘뻘 흘리며 노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나도 바쁘지 않으면 손님도 환자도 기꺼이 해준다.

 

그런데 이제쯤은 날마다 뒤집어지는 이 집 지붕을 탁 열어서 거꾸로 들고 탈탈 털고 싶어진다. 좀 말끔한 집안에서 차를 마시고 싶고, 따사로운 햇살에 훈풍이 그립고, 좀 한적하고 평화로운 나 혼자 시간도 간절해진다. 좀 지쳤다. 아이들도 몸부림이 나기도 날 것이다. 밖에 나가 선선한 공기 마시며 겨우내 집안에서 먹고 마셔 쌓인 몸 안의 나쁜 공기 씻어주어야 할 텐… 슬슬 밖으로 내몰아 놀 거리를 만들어 주어야겠다. 이제 공주들도 운동복이 필요한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