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행복한 고군분투
이사 후 서울에서 맞는 첫 3월. 새 출발의 의미가 한층 커진 시간이다. 우리 네 식구는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다. 나는 이런 3월이 좋다.
남편
아침 5시 10분 기상. 5시 45분에 집을 나서 5시 59분 전철을 타고 6시30분 정도까지 출근한다. 우리 집의 대표 ‘얼리버드(early bird)’다. ㅋㅋ 처음 한동안 자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단다. 반코트 입은 적당한 사복차림에 시사주간지 하나 들고 직장인처럼 출근했다가, 군복 갈아입고 권총 차고 경례하고 경례받고…. 그런 후 퇴근할 땐 다시 사복 갈아입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또 시사주간지 뒤적이며 오는 게 영 어색한 게 적응이 안 되더라고 하소연. 퇴근 시간? 평균이 없다. 빠르면 9시. 늦으면 12시. 더 늦으면 아예 안 들어오고 부대서 잔다. ㅎㅎ
연일 수면부족과 긴장의 시간인데 그에겐 주말과 휴일에 그 피로를 푸는 낙이 세 가지 있으니, 첫 번째는 아이들 학교 가는 토요일 오전에 나랑 조조영화 보러 가까운 극장 찾는 것. 두 번째는 중랑천변을 따라 네 식구가 운동하는 두 시간, 세 번째는 드라마 <내 생애의 마지막 스캔들>보는 것이다. <대왕세종>을 보다가 과감히 채널을 변경한 남자. 다른 남자들이 웃을 거다.
나
아침 5시 20분 기상. 전날 냉동실에서 꺼내둔 말랑한 찹쌀떡 한 덩이와 생과일주스 믹서에 윙~ 갈아서 5시 35분에 남편 앞에 대령. 남편 가고 나면 신문 보면서 안 잘 때도 있지만 아직 다시 잠들 때가 더 많다. 그러나 깊이 자지도 못하니 빨리 차라리 안 자고 이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습관을 들이고 싶은데 아직 몸시계가 허락질 않으니 괴롭다.
아이들을 7시에 깨워서 아침밥을 8시에 함께 먹고 학교 보내고는,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나름 경제활동(?)을 한다. 올해는 ‘애들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되도록 일을 마치고 컴퓨터 앞에서 뜨기’가 최고의 실천목표며, ‘밤새며 일하지 않기/주말엔 컴에 손대지 않기’가 부가목표다. 시간 관리를 잘 하며 살고 싶지만 오래된 나쁜 습성이 몸에 배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타이트하게 관리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리라 믿고 아자아자~ 힘내는 중.
최근엔 EBS 특별기획프로그램 <아이의 사생활> 5부작에 충격 받아서 엄마역할을 다시 리셋하는 중이다. 1부 남과 여/ 2부 도덕성/ 3부 자아존중감/ 4부 다중지능/ 5부 나는 누구인가. 한 살배기부터 초등학생 아이를 둔 모든 엄마들에게 ‘다시보기’를 꼭 권하고 싶다. 지금 내 자식에게 평생 영향을 줄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내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때로 등골 서늘하게 보여준다. 제목만 보고 익히 많이 들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하지 않아야 유용하리라.
솜솜
5학년. 겨울방학 내내 게임기 ‘닌텐도DS’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상에 시달렸다.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의 주범이 닌텐도’라는 기사에 반대를 표명한 남편과 ‘그동안 내가 너한테 물질적으로 그렇게 못한 것도 없다. 이건 안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 자식 간 관계가 나빠지기 쉽기 때문. 안 사주고 나쁜 게 차라리 낫다더라. 사줄 거면 벌써 사줬다’하고 못 박으며 버티니 3월 들어 완전히 포기했다. 어느 집엘 가도, 누가 우리 집엘 와도 다 하나씩 들고 있던 닌텐도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끼리 서로 게임하고 싶어서 신경전 벌이고 놀지도 않고 짜증내는 통에 질렸다. 이 때문에 나나 소미나 힘겨운 1,2월이었다.
새 학교 새 학년인데 부지런히 유세원고 써서 덜컥 회장에 당선되어 기쁜 나머지 ‘닌텐도 그까이 거~’하면서 잊은 것도 같다. 반장은 아예 없는 학교지만 진작부터 학급회의를 진행하는 회장을 해보고 싶어하던 꿈을 이루어 활기 넘친다. 담임선생님이 아리따운 처녀 선생님인데 너무 좋아한다. 선생님으로 처음 부임했고 첫 담임, 첫 제자들이라 모두 흥분해있다. 학부모총회 때 가뵈니 하얗고 여리여리한 분이 엄마들 앞에서 너무 긴장해서 안쓰러워 보일 지경. '힘내세요 샘.'
최근 솜솜은 최근 구운몽, 사씨남정기, 숙향전, 금오신화, 금방울전 같은 고전에 빠져있다. 지난 겨울 이사 오자마자 아이들과 상의해서 책을 좀 구입했는데, 이 고전시리즈를 제일 잘 본다. 요즘은 내 책꽂이를 흘낏대다가 차동엽 신부님이 쓰신 베스트셀러 <무지개원리>마저 읽어치웠다. 그리고 10대부터 50대 여성들의 네이트 공모전 글을 모은 <여자로 산다는 것>도 야금야금 다 읽어대더니 ‘또 이런 책 없어요?’ 한다. 어른 책을 살짝살짝 넘나드는 소미의 왕성한 독서편력이 이즈음 참 흐뭇하다.
손손
3학년. 겨울방학 동안 우리 세 모녀 사이에서 일명 ‘왜소녀’로 불렸다. 너무 궁금한 게 많아 ‘왜?’ 하고 너무 질문 많이 하는 통에 옆에 있는 제 언니가 지쳤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지은 별명인데 나는 내가 붙인 ‘궁금이’가 더 이쁘다. ‘왜소녀’ 자칫 ‘일본소녀’처럼 들려서…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궁금이 소은이가 좀 귀찮으셨나? 무슨 질문을 하니까 ‘그건 니가 몰라도 되니까, 니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하더란 말에 상처받고 일기에 주절주절. 선생님이 조금만 친절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시는 분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나는 집에서야 엄마한테 무슨 말을 물어도 다 대답해주겠지만, 3월에 선생님들이 얼마나 바쁘신지 또 얼마나 잡무가 많고 힘드신지 이해하라 하고, 그러니 네가 꼭 알고 싶은 일인지, 모르면 안 될 일인지 잘 생각하고 그런 것만 가려 질문하라고 했더니 그녀 왈. “네. 근데 사실 모르면 안 되는 일은 이미 선생님이 다 말씀해주세요. 에휴, 우리 선생님을 좋게 생각해야지. 일 년 동안 함께 하실 분인데 자꾸 나쁘게 보면 더 나빠져…”
최근 그녀에겐 ‘이산증후군’이 있다. 사극 <이산>을 한 회도 거르지 않고 보다보니 그 줄거리에 푹 빠져 이상 증상 생겼다. 우리 동네 ‘이손약국’은 ‘이산약국’으로, 프로배구팀 ‘흥국생명’은 ‘홍국(영)생명’으로 잘못 본다. 좀 중증이다. ㅋㅋ
지난 3월 둘째 주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반 고흐 전>을 봤는데 그렇지 않아도 고흐그림을 좋아한 그녀. 완전 광팬이 됐다.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꼽고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심히 보고 그것도 부족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딸 때문에 땀이 다 난다. 미리 책 좀 읽고 홈페이지 들어가서 공부해 가서 그나마 다행. 근데 기념품에 목숨 거는 우리 둘째 딸. 수많은 고흐 그림이 아로새겨진 기념품점에서 다 갖고 싶지만 한 가지만 고르라는 내 말이 너무 어려워, 벌개진 얼굴로 한참 종횡무진 가게를 왔다갔다하며 구경만 하고 안타까워했다. 선택의 번뇌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한 말. “엄마, 나 병 걸렸어요. 약도 없는 병에 걸렸어.” 결국 두 가지를 사 주고 바~로 병을 고쳤다는. ㅎㅎ
요즘 그녀는 6시 50분에 맞춰진 알람을 듣고 일어나 후다닥 씻고 그날 치 학습지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간다. 이렇게 하니까 오후가 한결 한가하고 너무 좋다나? 안 깨워도 잘 일어나니 신통방통하다. 좋은 습관이 나나 소미보다 빨리 들 아이다. 그것이 ‘궁금이’에 이은 그녀의 두 번째 장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