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폰을 아시나요?
일찍부터 집밖에서 딸들의 안전에 관한 한 과민하다 싶을 정도인 남편. 남편 때문에 나는 일부러라도 조금 느긋하게 구는데, 최근 들어 안양어린이 사건과 일산초등학생 납치미수사건까지 연일 터지면서 그의 불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가스총을 사줄까, 무전기를 사줄까, 호신용경보기를 사줄까 며칠째 인터넷을 들락거리면서 나보고도 무슨 대책 좀 세워보자고 채근을 했다.
나는 그 대책이라는 것이 호신용무기로 너무나 거해서 대꾸도 안했다. 아무리 아담한 생활용무전기지만 무전기 들고 학교 다니는 딸들을 상상하니 너무 웃음이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외출을 해서 그 무전기 들고 우리 동네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라 삑~ 불합격!
그런데 최근 우리 집 길 건너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이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팔을 찔린 사건이 벌어졌다. 나도 일산초등생 엘리베이터 CCTV 영상을 보고 가슴이 벌렁거렸는데 가까이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 소름이 돋으며 너무 무섭다. 아이들은 학교 앞 피아노 학원이 있는 상가건물에 피의자 몽타쥬가 붙어있더라고 했다.
나는 아직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사줄 계획이 없는데, 그런 흉흉한 사건과 함께 ‘무슨 일 난 다음 후회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대책은 세워야 한다’고 남편이 재촉하면서 요즘 마음이 슬슬 움직였다. 그래도 요즘 그 화려한 핸드폰을 사줄 수가 없어서 통화와 문자만 되는 기본적인 전화기를 찾았지만, 수출용은 있어도 우리나라에는 수요자는 있어도 수익성이 없어서 안 판다는 사실만 알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런 핸드폰 어디서 굴러다니는 중고단말기라도 살 수 없을까 끊임없이 찾던 끝에 드디어 ‘심봤다~!’ 어린이를 위한 최소한의 기능을 갖춘 폰. 본래 이름은 ‘아이키즈폰’이지만 우리 식구는 ‘고양이폰’이라고 부른다. 고양이 귀가 달렸고 수염이 가운데 있는데다 엘시디 창에 ‘잠금장치’를 설정하면 잠자는 고양이가 나타난다.
두 아이 반 친구들이 모두 이 핸드폰을 처음 본다고 했단다. 무척 신기해하며 이거 진짜 돼? 장난감 아냐? 어디 번호 불러봐 내가 해보게...이러면서 난리란다. 디자인이 깜찍해서 꼭 장난감 같지만 진짜 핸드폰이다. 요즘은 서비스 가입하고 의무약정기간만 정하면 고급 단말기도 거의 헐값에 사거나 공짜지만, 가려운 곳만 제대로 긁어주며 꼭 필요한 기능만 있는 이 어린이폰은 단말기 값이 좀 들더라도 부작용도 적고 차라리 좋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에게 보통 핸드폰 사주기 찝찝하신 분들께 이 고양이폰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1. 본명: 아이키즈 폰
2. 이동통신사: SK텔레콤
3. 가입자격: 만 12세 미만 어린이
4. 전화 걸기: 4개의 단축키에 입력된 번호로 통화가능 / 아빠, 엄마, 이모,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런 이름이 설정되어 있음 / 긴급버튼을 누르면 네 명의 보호자와 동시통화 / 사전 입력된 4개의 번호가 아니라도 한번쯤 걸려온 전화번호로는 전화 걸 수 있음
5. 전화 받기: 제한없음
6. 문자메시지: 받을 수는 있지만 보낼 수는 없음
7. 무선인터넷통신: 없음
8. 위치추적 서비스: GPS로 부모전화에 아이 위치 표시해 줌. 안심존(Zone) 3군데 설정하여 아이가 안심존 이탈시 문자메시지로 알림. 안심존에서 1km 이상 이탈시 전화벨이 울리고 ARS로 알림. 전원이 꺼져있어도 GPS 위치추적 가능.
9. 요금제: 아이키즈 전용요금제 기본료 11,000원 / 월 70분 무료통화. 위치확인서비스 월 20건 무료 / 무료통화가 소진되면 발신 정지. 단 부모가 원할 시 2만원까지 1천원 단위로 충전가능. (후불제) / 고객이 만 12세 이상이 되면 단말기는 그대로 쓰고 요금만 자동적으로 팅100요금제로 전환됨
10. 그 외: 벨소리 몇 개와 진동 설정 자유롭게 가능 / 간단한 게임 두 개 들어있음 / 단말기 구입부터 서비스 가입까지 인터넷으로 모두 가능 / 가입서류 보내면 전화 개통해서 보내줌 / 나는 포털사이트 쇼핑몰에서 구입했음
* 사족: 남편은 4개의 단축키 중 하나에 아이들 학교와 가까운 파출소 전화번호를 입력시켜줄 계획을 가지고 있음. 같이 파출소를 갈 거라나? 나보고 하라는데 싫다 했다. ㅎㅎ 아빠가 딸들을 위해 흔쾌히 할 일을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고 사실 쑥스럽다. 파출소 전화번호 입력하는 건 내가 생각해낸 것이지만 막상 하려하니 유별나게 구는 것 같아서… 어쨌든 애들은 너무 좋아한다. 생각지도 않게 빨리 핸드폰이 생겼으니 당분간 꿈결 같은 나날이다.
삐리리리~~
“엄마, 피아노 레슨은 끝났어요. 상가 놀이터에서 40분만 놀다 가도 돼죠?‘
삐리리리~~
“엄마, 청소 당번이라 한 30분 늦어요."
근데 이렇게 해주면 완전히 안심해도 되나? 에휴~ 참, 주머니 출혈도 적지 않고 입맛도 씁쓸하다. 그래도 어린이날 선물은 생략하기로 했으니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