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그리고 엄마노릇
(1) ******************** "아이구, 딸들이 참 이쁘게도 생겼네. 세상에 참. 둘이 손까지 꼭 잡고 사이좋으니 더 이쁘네." 이제 집 가까운 데는 살살 아이들 태우고도 혼자 운전한다. 날씨도 아직 쌀쌀한데 아침 일찍 일어나 유치원 다니는 일이 힘들었던지 소미가 며칠 전 가볍게 몸살을 앓았다. 늘 남편 얼굴만 쳐다보거나 남의 집 차만 바라고 아이들 병원 가는 일에 발을 동동 굴렀던 내가 처음으로 두 아이를 모두 태우고 운전해서 가까운 읍내의 병원에 갔다. 참 소심하고 겁 많은 인간 양재형 용됐다 싶어 감동이 밀려왔다고 말하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아무튼 이 좋은 걸 왜 일찍 못 했나 싶은 게 그 오후 봄 햇살이 참으로 따사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약국. 아이들에게 맛좋은 비타민 제제 한 알씩을 주고는 한참 안쪽에서 약을 짓는 기미더니 이윽고 약봉지를 내밀며 한다는 말이
이랬다. "애기 엄마 교회 다니우?" 아하, 그제야 이 약사 할머니의 저의가 환히 보였다. 그렇다고, 괜찮다고, 감사하다고 말한 후,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게 해서 앞세워 데리고 문을 나섰다. 감사? 무얼 감사하는 거지? 남 가진 거 나도 갖게끔 도와주려고 해서? 말해놓고 나서 생각하니 웃겼다.
(2) ******************** 거기에 타고난 급한 성격까지 힘을 보태주니(?) 뒤돌아보면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을 때가 많다. 해놓고 후회하는 건 때마다의 일이고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하고 살겠거니 위로를 삼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저녁 식사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모여서 밥을 먹는데 소미가 계속 찡찡 짜증 섞인 목소리로 김치 좀 작게 찢어달라, 저 반찬 좀
가까이 놔달라 요구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좀 남다른 행동을 하면 '그런 거 누구한테 배웠어?'하는 말을 아주 습관처럼 잘 하는데 그날도 예의 그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좀 싫어한다. 왜냐, 남편이 때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지라도 대부분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처럼 가슴에 팍팍 꽂혀 들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찔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밥상을 물리려고 할 즈음 무슨 일 때문인가(아마 밥 먹는 태도 때문에 그런 것인 듯) 내가 소미와 소은이 모두에게 역정과 짜증이
섞인 말투로 야단을 했었다. 그랬더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남편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내 잘못이라고 여겨질 때 잘 나오는 남편의 그 '탓 증후군'은 늘 나를 화나게 하지만, 그래도 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형편이라 화도 못 내고(그날은 얼굴이 뜨거워졌지 화는 안 났다) 잠자코 상만 치웠다. 그런데 그 시간 이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영 기분이 사나웠다. 칼럼에서 '엄마도 사람이다'라고 큰소리 땅땅 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 호기는 간 데 없고 그냥 내 엄마노릇이 자격미달에 버거운 생각만 들었다. 본래 곱고 보드라운 심성을 가질 수 있는 애들이 나 때문에 성질 다 버리는 거 아닌가 싶은 게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런 생각은 내가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더 낳아 기르기에 턱없이 부족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으로 확대 비관하게 되었다. 요즘 셋째 아이는 '부의 상징'이라는 우스개 말이 있지만 내가 아무리 천석꾼 아니라 만석꾼이라도 아이는 더 낳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아이도 제대로 잘 길러낼 수 있을지 요즘 겁이 나기도 한다. 후후, 이런 내 생각이 우습다는 것 나도 잘 안다. 오버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아들을 가져야하지 않겠느냐는 약사 할머니의 말과 그날 저녁식사 중에 있었던 일이 겹치며 나를 며칠 간 아주 슬럼프에 빠지게 했다.
(3) ******************** 그러면서 나 지금 육아일기에서 반성문 쓰고 있다 했더니 "그런 거 왜 써? 정말 내 아이라도 확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싶을 정도로 화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그냥 소리도 지르지 말고 두 아이 각각 다른 방에 집어넣고 엄마가 말할 때까지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고 그 방에서 나오지도 말라고 해" 그랬다. '그래, 넌 좀 반성해야 돼. 내가 봐도 너 애들한테 좀 많이 그래' 이럴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을 들으니 눈물나게 고맙고 힘이 났다. 전화 끊고 두 아이 모두 불러 방에 앉혀놓고 그럼 앞으로 전화벨이 울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우리 집은 이렇게 날마다 전쟁이다. 국지전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간간이 일어나는 전면전은 내가 회초리를 들면서 끝이 난다. 선전포고도 없는 무식한 싸움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이 전쟁터에서 휴전과 종전을 주선해야 하는 중재자는 너무 괴롭다. 아, 엄마노릇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