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학교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소리다. 생각지도 않게 2학년이 되어 등교한 지 이튿날 반장으로 뽑혀 들어온 소미 때문에, 학부모총회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부담이 적지 않았다. 반장아이의 엄마는 자연스럽게 반대표엄마가 되는 분위기와 주변에서 들려주는 반장엄마의 역할에 대한 수많은 사례에, 내가 그걸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체할 기분이 되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오래 해왔던 일이 있는데, 최근 일의 양이 많아져서 적지 않은 부담을 가지고 있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마음을 내는 일이 더 어려운 처지다. 거기다 남 보기에 겉으로는 명랑하고 씩씩하고 적극적으로 보여도, 사람 앞에 나서서 (대단한 일이 아니라도) 무슨 일을 도모하고 이끄는 일을 못하겠는 소심한 마음이 더 내 허리춤을 잡아끈다. 그래서 세상에 내 아이 혼자 반장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표 엄마가 무슨 큰 벼슬도 아닌데, 난 총회 이틀 전부턴 밥도 잘 안 먹힐 정도로 유난하게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학교에 가니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걱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 사람이 소미의 담임선생님이셨다. 아이가 반장이 되었다고 엄마가 당연히 반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말라 하셨다. 다행히 총회 전날 부반장 성우 어머니에게 부탁을 드린 게 이야기가 잘 되어서 성우 어머니가 대표엄마를 하게 되었다.
- 아이에게 큰 문제가 없으면 학교에 자주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 공교육입니다. 아이들과 제가 다 알아서 하겠으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 아이들과 같이 비질도 하고 물걸레질도 하면서 가르치겠습니다.
-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일을 가장 조심하겠다고 늘 다짐하며 삽니다. 특히 말로서 아이 삶에 평생 잊혀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일을 가장 조심하고 있습니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단정하고 차분한 이미지의 담임선생님은 반 교실에서 학부모가 모인 가운데 이런 이야기들을 하셨다. 연한 청록색 계열의 원피스에 차분한 스카프를 한 장 목에 두른 선생님을 뵙고 소미가 왜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교생 280명 안팎의 작은 학교니 선생님들이 두루 아이들을 많이 아시는 듯한데, 담임선생님 역시 소미를 1학년 때부터 눈여겨보고 귀여워하셨다 하시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우리 소미 2학년 때도 복 받았구나’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작은 키, 가늘가늘한 몸에 동그란 눈. 그런데 소미가 이런 겉보기와 달리 공부시간엔 약간 굵고 큰 목소리로 씩씩하고 또랑또랑하게 발표하는 모습이 가장 놀랍다 하셨다. 반장선거는 일부러 전날 미리 말하지 않고 당일에 다 해버렸는데, 선생님은 그 방식이 좋다 하셨다. 그러면서 크게 문제가 있어서 상담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학교에 일부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잘라 말하셨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선생님이 늘 어렵고 얼굴 뵈어도 그다지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나로서는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해 참석하지 않았던 학부모총회를 올해 처음 가보고는 이런 일이 괜한 일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특히 올 들어 새롭게 편성된 특수학급(사랑반)에 대한 소개가 의미 있었다. 현재 두 명의 아이가 ‘사랑반’에서 공부를 하는데 그 중 한 명이 마침 소미네 반이다. 선생님 말씀이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라는데 어떤 과목은 특수학급 교실에서 전공하신 선생님께 배우고 어떤 과목은 교실에 와서 2학년 2반 친구들과 함께 한다고 한다.
놀라운 건 학교에서 돌아와 안 사실로 그 사랑반 아이가 우리 아파트 통로 1층에 살다가 지난 가을 옆 동으로 이사를 간 집 아이라는 점이다.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남편도 그 아이 아빠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는 모양이었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생이 소은이하고도 동갑내기여서 저희들끼리는 놀이터 같은데서 아는 척하고 놀기도 하는 눈치였다.
소미는 사랑반의 정학이가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이젠 좀 나아졌다고 한다. 전에 있던 좀 큰 학교에서 반 아이들에게 많이 맞아서, 그 뒤로 가까이 오는 애들은 자기를 때리려고 하는 줄 알고 제가 먼저 손을 휘저으며 때리려는 시늉을 한다니 보호본능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짓궂은 친구들로부터 정학이의 방패까지 되겠다는 소미는 정작 정학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일단 정학이와 마주치면 학교에서든 아파트 놀이터에서든 웃으며 "정학아, 안녕"하고 인사하기부터 하라고 했다. 정학이가 놀이터에서 자전거 타는 거 서너 번 봤는데 아는 어른들 보면 인사도 하고 웃기도 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니, 일단 친절하고 상냥한 얼굴을 익힌다면 경계심을 풀 것 같았다.
그리고 소미에게 정학이를 무작정 도와주어야 할 불쌍한 친구라고만 생각지 말라고 했다. 정학이는 사랑해주시는 부모님도 계시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친군데, 그건 정학이를 위하는 생각이 아니니 정말 도움이 주어야 할 때 도움을 주고 평소엔 다른 친구들한테 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라 했다.
한 며칠 지내놓고 식구끼리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다가 난 소미에게 물었다. 혹시 선생님 계실 때는 안 그러다가 선생님만 안 계시면 정학이를 괴롭힌다거나 놀리는 친구 없느냐 하고. 그랬더니 소미는 망설임 없이 “절대 없다”고 했다. 난 마음이 흐뭇하고 따뜻했다. 소미는 정학이의 방패 노릇을 할 필요가 없겠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스스로 잘 판단하고 더 잘한다. 지금은 정학이의 보호본능으로 인한 공격성 때문에 아이들이 겁을 먹고 얌전한 건지 알 수 없지만, 학교에 사랑반이 편성된 그 하나의 사실이 그대로 교육이 되리라 믿는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사는 길을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공교육의 소중한 가치라고 여긴다.
괜한 긴장감으로 떨리던 학부모총회와 담임선생님 면담을 하고 오니 비로소 봄바람도 햇볕도 더 따사롭게 느껴진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1학년 때보다 스스로 제 할 일 잘 하면서 학교생활에 충실한 소미를 보며, 지난해와 올해는 집에서보다 학교에서 가르쳐서 배우는 것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 책 속에서 배우는 것보다 생활 속에서, 세상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