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초콜릿 단상

M.미카엘라 2009. 2. 14. 02:31

 

학교 다닐 때 친한 친구 중에 무엇인가 주고받는 일에 일사불란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받으면 얼른 빠른 시간 안에 그에 준하는 무엇으로든 갚아야 마음 편안해했고, 누군가에게 뭔가 해주었는데 상대가 그 고마움을 어떻게든 되갚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대번 인색해진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무남독녀 외딸이었던 그 친구에 견주어 나는 봉급생활자였던 아버지가 홀로 버시는 돈으로 사는 집의 여섯 형제 중 막내였던 터라 용돈이랄 것이 따로 없었다. 엄마는 돈이 없어서, 등교하는 우리들을 세워두고 옆집으로 뛰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용돈이 크게 아쉽지 않았던 이 친구에게 두어 번 연거푸 떡볶이를 얻어먹고 난 후, 나는 이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재형이는 노랭이, 얻어먹을 줄만 알지 갚을 줄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다. 나는 남편에게 주려고 조금 특별한 초콜릿을 샀다. 일명 ‘착한 초콜릿’으로 불리는 공정무역(Fair Trade) 초콜릿이다. 헐값에 가난한 나라의 카카오농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이 초콜릿으로 나는 조금 새로운 소비에 눈떴다. 커피나 설탕도 저개발국 가난한 생산자의 이익을 배려한 공정무역제품을 사먹는데, 2년 전부터 페어트레이드 상품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번 발렌타인 데이에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꼭 이 초콜릿을 선물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침 요즘 캠페인도 많아지고 은근한 인기를 모으나보다.  

 

나는 초콜릿을 사면서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 사이에는 공정거래라는 것이 있을까. 내가 밥을 한번 사면 다음번엔 꼭 친구가 밥을 한번 사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일까. 친구가 우리 오빠 돌아가셨을 때 3만원 부조했으니까 나는 친구 엄마 돌아가셨을 때 3만원 이상 부조하면 손해 보는 것일까. 늘 ‘빈대붙기’에 능수능란한 사람도 꼴불견이지만, 너무 주고받는 것에 칼 같은 사람도 친구나 이웃하기 불편하다. 무엇인가 주고받는 일은 즐겁고 따뜻한 것이지만, 내가 A에게 받았어도 B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고, B는 C에게, C는 D에게,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D가 A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주고받는 것의 형태가 다를 수도 있고 양이나 부피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건데, 그걸 잴 수 있는 절대적인 저울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싶다.

 

 

 

 

부부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연애와 신혼시절을 보내고 나면, 눈에 콩깍지가 벗겨지고 슬슬 상대의 단점이 장점보다 많이 보이는 그 지점에서 본전 생각 찐하게 나고 저울의 바늘은 한쪽으로 기운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저울은 그대로 그렇게 수리불능의 상태로 고장나버린다. 왜 나만 손해 봐야 돼? 난 결혼해서 이렇게 망가졌는데, 저 사람은 왜 하나도 변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만큼 희생했으면 자기도 뭘 좀 내놔야지. 애는 같이 만들어놓고 왜 나만 이렇게 속 끓여야 돼? 너만 귀한 자식이냐, 나도 우리 집에서 귀한 자식이야 이거 왜 이러셔… 

 

하지만 내 생일도 잊고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온 남편이라고 이불 하나 던져주고 거실바닥에 재우는 것이 꼭 공정한 건 아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불퉁스러운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같은 무게로 비아냥거려 주는 것이 꼭 공정한 건 아니다. 아직 화가 안 풀렸는데 이불 속에서 끌어당긴다고 끝끝내 차갑고 야멸차게 지조를 지키는 것만이 꼭 공정한 건 아니다. 속은 부글거려도 일단 일을 수습하고 좋은 타이밍을 찾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고, 그래 내가 져준다 까짓, 하면서 한쪽 눈 질끈 감아주면 나중에 그쪽에서 두 눈 다 감아주는 일이 생길 때도 있었다.

 

남편은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이런 날을 즐긴다. 그냥 일상의 소소한 활력이나 이벤트로 받아들이니 나도 즐겁게 지낸다. 솜손은 아빠 준다고 작은 초콜릿 녹여서 곰돌이, 강아지 모양 틀에 부어 굳힌 귀여운 핸드메이드 초콜릿을 준비했다. 다음 달에 남편은 아주 맛있는 사탕으로 우리에게 ‘갚아야’ 한다. 그것도 애정과 신뢰를 듬뿍 담아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