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흰 감동이었어!
아침 7시 30분. 두 아이가 깨우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웬일이냐? 이렇게 일찍. 잠꾸러기들이…”
그랬더니 두 아이가 입을 모아 이렇게 외친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나와서 아침식사 하세요~”
잠도 덜 깼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들 손에 이끌려 나오니 거실엔 생각하지도 못한 생일상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새로 지은 쌀밥에 바지락 미역국, 골뱅이 무침, 작고 예쁜 초코케이크, 복숭아까지 한 접시 깎아서 나름대로 구색을 제대로 갖춘 생일상이다.
“아후, 솜손 너희들… 정말…”
난 그냥 가슴 한 가운데가 찡해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전날 뙤약볕 속에 둘이 잠시 자전거 타고 놀고 오겠다고 해서 해가 좀 기울면 나가라 했는데 굳이 나간 게 이상했는데 그게 장을 보는 일일 줄은 몰랐다. 냉장고에서 케이크는 보았지만 이렇게 상까지 차릴 줄 몰랐다.
“근데 아, 너무 덥다. 문이라도 열어놓고 할 것이지. 어후~ 이 땀 좀 봐.”
두 아이를 안고 땀이 흐르는 이마 전을 닦아주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엄마, 우린 문 열 생각도 못했어요. 이모가 전화하셨을 땐 벨소리에 엄마 깰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히힛~”
낮에 워낙 더웠던 데다 맨 위층 우리 집이 워낙 더운 집이라 잠들기 전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두 시간 타이머 설정을 해놓고 잤는데, 그 문을 열 생각도 못하고 살금살금 내가 깰 세라 밥 짓고 상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이 잠꾸러기들이 아침 6시에 알람을 해놓고 일어난 것도 대견하고, 아침에 먹을 밥이 있었는데 뚝배기에 새 밥을 한 것도 갸륵하고, 내가 바지락 넣은 시원한 미역국 좋아한다고 이모한테 몰래 물어서 한 번도 안 끓여본 국까지 끓인 것이 기특했다. 소은이가 음식을 만들고 소미가 과일 깎고 상 차리는 분업을 했다고 한다.
“엄마, 난 소은이가 혹시 뜨거운 국물에 데일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엄마가 평소에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국물 있는 건 라면도 못 끓이게 하시니까...”
“근데 엄마, 미역국이 좀 맛이 없을 것 같아요. 국물이 적고 국간장은 좀 많이 들어갔나봐요. 색도 검고. 그리구 마른 미역을 얼마나 불려야 되는지 몰라서 너무 많이 불렸나 봐요. 좀 덜어놓았으니까 그건 오이 넣어서 냉국 해주세요.”
“아냐. 맛있어. 아주 잘 끓였어. 정말 고맙다 솜손. 아빠 안 계셔도 이렇게 딸들이 곁에 있어서 생일상까지 차려주니 엄만 행복하다 정말.”
난 정성껏 만든 선물에 편지까지 받아 읽고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엄마, 왜 우세요. 기쁜 날인데.”
“에이, 그러게. 좋아서 눈물 흘린 건 이번이 처음이네. 아, 좋아도 이렇게 진짜 눈물이 나는구나아~”
쑥스럽게 웃으며 나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마음이 벅차서 사실 밥맛도 국맛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밥을 먹었다.
“근데 너희들이 돈이 어딨다고 이렇게 케이크도 사고 골뱅이도 사고 바지락도 사고 그랬어? 소미 용돈 다 썼겠네.”
“아니에요 엄마. 아빠가 주셨어요.”
“아빠가? 언제? 지난 주에 가서 만났을 때?”
“아뇨. 교육 가시기 전에 아빠가 저흴 불러서 돈 5만원 주시면서 엄마 생신상 차려드리라고 하셨어요.”
“아이고, 그랬구나. 이 생일상이 아빠 덕분이기도 한 거네. 이거 또 눈물 나겠는데.”
“근데 엄마, 아끼고 아껴서 5만원 중에 2만원 쓰고 3만원 남았어요.”
나는 또 한번 가슴이 찡했다. 교육 앞두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남편이 미리 이런 배려까지 하다니… 너무 고맙다. 점심 즈음에 센스쟁이 남편에게서 애들이 생일상 잘 차려주더냐고 전화가 왔다.
“완전 감동이었어. 아빠와 이모의 코치를 받은 애들이 완벽하게 했어. 거기다 우리 딸들이 알뜰하기까지 해요. 5만원 중에 2만원 쓰고 3만원이나 남았대. 나 이거 딸들 너무 잘 키운 거 아냐? 열 아들 안 부러워. 히히히...”
남편도 킬킬 웃으며 기뻐했다. 자신의 여유 없고 피곤하고 힘겨운 처지야 어쨌든 나와 솜손이가 재미있고 즐겁게 지내는 걸 제일 기뻐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점심엔 언니가 밥 산다고 했다니 잘됐다고 좋아한다. 아들을 대동하고 와서 큰 꽃다발 안겨준 언니와 맛있는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아침 생일상 이야기로 또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 생일은 그렇게 어느 해보다 더 행복하게 지나갔다. 이 즐거운 날을 빨리 정리해 올리고 싶었는데, 생일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셔서 그 슬픔에 잠시 망연하게 손 놓았던 글을 조금 손보아 이제야 올린다. ***
*** 유머가 가득한 소미의 편지. 엄마도 칭찬하고 자기도 칭찬 하느라 바쁘다. ㅎㅎ
*** 갖가지 처방이 든 쿠폰알약. '스타일'이라는 쿠폰이 있는데, 그건 엄마랑 외출할 때 자기가 입고 싶은 옷과 엄마가 입히고 싶은 옷이 다를 때 사용하는 거다. 그 쿠폰을 제시하면 엄마가 입으라는 옷을 군소리없이 입겠단다. 소미는 자기가 가죽끈 달린 초록색 점퍼스커트에 동그란 마직 모자 쓰는 걸 내가 좋아하는 걸 안다. 같이 외출할 때 내가 맨날 그 옷 입어주길 바래서 좀 옥신각신 하니까 저런 생각을 했다.
*** 소미가 만든 유머러스한 메모꽂이. 제 아빠 만나고 오는 길에 차 안에서 다 쓴 고속도로 카드 발가락 사이에 끼고 놀던데서 착안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