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또 다른' 님께
언니!
독일 가서도 한 일 주일 그랬다죠? 소미는 간 지 이틀만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언니가 사주신 케밥을 못 먹었다고 하더라구요. 집에 와서도 그러네요. 음식 먹을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하루에 한 끼만 조금 먹은 적도 있어요. 머리가 내내 아프다고도 했어요. 파리에 가서도 또 무슨 울렁증이 있었는지 신부님이 사주신 크레페를 조금밖에 못 먹었는데, 지금 새록새록 그 환상적인 맛의 크레페에 대한 미련이 물밀듯 밀려온다 해요. 더 어려서 자동차부터 군수송기까지 무슨 수단을 이용해서 장거리 여행을 해도 생전 멀미 같은 건 하지 않는 애인데 이번 여행은 차원이 달랐던 거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그러더니 어제 비로소 이제 엄마를 여행시켜드리겠다고 하네요. 자기 핸드폰에 담긴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방에 가서 다이어리를 가져왔어요. 이제 정신이 드나봐요. 이제 독일 아니라 어딜 가도 기내식 먹고 체하는 촌티는 내지 않을 거라며 웃는 얼굴이 한결 생기가 느껴져요. 다녀와서도 생각보다 거기서 지낸 이야기를 자세히 잘 말을 하지 않아서 좀 서운하다 싶었는데 컨디션이 많이 안 좋긴 했나봐요. 저도 채근하지 않고 말하고 싶을 때를 기다려 들어주고 조금씩 물어보고 했는데, 어제는 사진을 순서대로 배열하고는 꽤 긴 시간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다이어리는 왜?” 했더니 “중요한 거 빼먹을까봐. 내가 여기 다 적어두었거든요” 하면서 대강 펼쳐 보여주는 다이어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건 애들에게 일급비밀 물건일 테니 보는 거 싫어할까봐 거의 관심을 안 두었거든요. 쓸 공간이 한정적이어서 메모식 기록이 되기 쉬운 다이어리가 뒷부분에 여행문으로 꽉 차 있네요. 온갖 차표, 입장권 같은 거 빼곡하게 붙이고 여기저기서 오린 사진들이 붙어있었어요.
내가 놀라워하며 정말 네 최고의 재산이다, 뿌듯하겠다, 대단하다, 글만 있는 일기보다 훨씬 깨알재미가 있다, 정성과 공이 정말 많이 들었겠다, 하며 칭찬을 했더니 소미는 작년과 재작년에 쓴 다이어리까지 가져와서 한참 구경시켜주네요. 제천 봉사, 수학여행, 주일학교 캠프, 제주 트레킹, 아이돌 콘서트, 학교축제, 고교 입시 준비 등 정말이지 무수한 견문록이 가득했어요. 소은이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난 저 정도는 아닌데. 밀려서 몰아 쓸 때가 많아서 저렇게는 못해. 히히”하며 웃었어요.
소미는 사진을 보면서 하이델베르그의 아름다운 정경에 대한 감탄, 울타리나 경계가 없는 대학도시의 특별함, 대도시 프랑크푸르트의 명소, 독일의 문화재 보호에 대한 생각,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을 거의 본 못 신기함, 대강 가늠한 독일 청소년의 문화, 재독한인 어르신모임의 기이한(?) 경험(동영상도 짧게 찍어옴 ㅋㅋ), 수퍼마켓에서 장보기, 해먹은 음식 이야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독일 고양이의 사랑스러움, 독일과 프랑스의 확연히 다른 도시 분위기에 대한 감상, 두 나라 건축물의 차이에 따른 자기 취향, 예정에 없던 수도원에서의 프랑스식 식사, 프랑스어 미사, 루브르 박물관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된 이야기, 책에서만 본 문화재를 실물로 본 비현실적인 느낌 등등 여기서 다 말로 하기엔 많은 이야기들을 같이 했어요.
저는 마음이 시원해지며 유쾌해졌어요. 같이 간 건 아니지만 같이 간 것만큼 그 즐거움과 환희, 감동이 잘 전해졌어요. 독일에서 돌아온 후, 일주일 동안 주로 했던 언니네 집에서 지낸 이야기가 1부였다면 여기저기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어제의 이야기가 2부인 셈이었어요. 이것으로 독일에 간 소미의 모든 여정이 비로소 마무리되는 기분이네요.
언니. 소미에게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 인연이 10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이지만, 블로그를 통해서만 봐온 소미를 언니에게 한 달 동안 보낸다는 건 저에겐 도전이었어요. 더구나 그 무렵 소미의 단점이 자꾸 크게 보여 다툰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 내 아이의 단점을 알아본다는 것은 적잖이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이었어요. 정직하게 말하면 제 안의 인정욕구, 말하자면 “재형씨, 소미 참 잘 기르셨어요”하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소미의 행동이 진실로 걱정된다기보다 우선 그냥 그 행동이 엄마인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이었던 것 같아요.
전 멀었어요. 언니와 문자로 무수한 대화를 하면서 저를 잘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문자 대화를 끝내고 나면 나는 소미를 위한 말을 했던가 나를 위한 말을 했던가 한참 복기했어요. 소미보고 뭐라 할 게 아니라 저부터 손톱만큼이라도 변화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사람이 마음을 바꾼다는 것과 바꾼 마음대로 실천한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 실감해요. 새해를 독일에서 맞이하고 돌아오는 소미에게 이제부터 나는 좀 이렇게 하겠다 생각했지만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날마다 도전이고 시련이네요. 습관이 되어버린 어떤 것들이 어느새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요. 54일간 날마다 하는 묵주기도를 시작했는데 이를 하지 않으면 이 마음가짐마저 어느새 사라져 버리겠어요.
언니!
소미는 오늘 개학했어요. 단축수업하고 절친 한 명 데리고 와서 방에서 수다가 늘어지네요. 소미친구는 가족들과 중국을 며칠 다녀온 모양이예요. 두 아이가 서로의 여행 이야기하느라 점심 먹은 지 한 시간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출출하대요. 냉동실에 있던 가래떡 봉지 더운 물에 담가 급해동하는 중이예요. 떡볶이 해주어야겠어요.^^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