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일 둥지탈출
소미를 못 본 지 꽤 되었다. 7월 4일 집을 떠났으니 3주가 넘었다. 지금 소미는 오래된 꿈을 이루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떠나기 전날,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 2학년이 되면 유럽여행을 가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을 하면서, 그 꿈을 이루게 되어 마음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벅차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두 달 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지난 1년 반 동안 이 여행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소미는 순수하게 자기 힘으로 여행비를 마련했다. 여행비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 후부터 학비를 내준 것 말고는 우리는 소미에게 돈을 준 일이 없다. 크고 작은 용돈도 스스로 다 해결했다. 1년 동안 학교 후배들 과외 해주고, 겨울방학 2개월 동안 어린이 직업체험 테마파크에서 주6일 꼬박 근무하고, 장학금도 받아서 알뜰살뜰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을 야금야금 쓰게 될까 두려워 지난 학기엔 주말에 드럭스토어에서 알바를 하며 용돈을 따로 벌어 썼다. 여기저기에서 달러며 유로며 주위 어른들이 소장하고 계신 외국화폐로 후원해주셨으니 최선의 비용마련은 되었다.
7월은 중학교 때 친구와 단 둘이 동유럽을 다니고 있다. 친구와 머리 맞대고 꼼꼼히 엑셀에 정리한 여행일정표를 보니 큰 도시 위주로 대략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 빈, 잘츠부르크, 부다페스트, 자그레브,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여정이다. 지금은 동유럽 마지막 여정인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사진을 보내오고 간간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그 황홀하고 벅찬 경험들을 어찌 다 간직하고 돌아올지 기대가 된다.
잘츠부르크에서 보내온 소식은 어떤 도시보다 내게도 좀 감개무량했다. 어릴 때부터 소미소은이의 모습을 여기서 읽어온 분들은 익히 아시겠지만 이 자매들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광팬이다. 어린 시절 한 때, 매일매일 이 뮤지컬 영화를 외울 정도로 보았던 ‘덕후’가, 드디어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 억누를 수 없는 그 흥분을 고스란히 전해왔다. 잘츠부르크 숙소 라운지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청년들과 <사운드 오브 뮤직> 보면서 ‘도레미송’을 부르고, 이 영화의 오마주 영상도 찍었다며 집에 돌아와 개봉하겠다고 기대하라 한다.
요즘 애들 해외여행이 다 저런가 싶다. 머리보다 더 올라간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가진 배낭을 매고 좀 꼬질꼬질하게 다니는 그런 여행이 아니다. 그게 더 멋있는데, 여행은 좀 돈도 간당간당해서 고생을 해야 남는 게 있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어른세대의 고정관념이지 싶다. 자기가 비용 마련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여행하겠다는데, 되도록 몸으로 때우고 아껴쓰면서 하나라도 더 많이 보고 오는 그런 배낭여행 플랜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소미는 가기 전에 그랬다. 이 여행은 오랜 꿈이기도 했지만 열심히 산 자기를 위한 선물이라나?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어른들이 들으시면 코웃음 치겠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 숨차게 산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도나우 강에서 크루즈를 타며 선상 식사도 즐기고, 재즈카페도 가고, 마리오네트 공연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도 가고, 필름페스티벌도 가는 다채로운 여정이다. 새카맣게 타고 꼬질꼬질한 대학생은 없다. 한껏 멋을 낸 화보 같은 사진들이 입 떡 벌어지게 한다.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제대로 남기고 있다.
이제 친구와 헤어질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 친구는 돌아오고 소미는 독일에 남는다. 8월 한 달 프랑크푸르트에서 머지않은 곳에 계시는 S이모 댁에 머물며 베를린, 파리, 런던, 벨기에 등을 오가며 보낼 계획이다. 이때는 며칠씩 그 도시에 사는 지인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아쉽지만 영국은 안 가기로 했었는데, 여행준비 막바지에 성사된 런던행은 5만원짜리 특가항공권이 눈에 띄면서 급물살을 탔다. 런던에서 유학 중인 친구의 기숙사에서 며칠 신세 짓기로 했다며 좋아 팔딱팔딱 뛰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갈까,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을 한편 볼까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하던 아이는 어느새 생각을 건너뛰어 베를린 영화박물관 갈 일에 설렜다.
소미는 문화콘텐츠 기획자가 되고 싶어한다. 여행은 아마도 꿈을 이루는 동시에 또 다른 꿈으로 건너가는 어떤 징검다리가 될 것 같다. 2학년이 되고나서는 이제 전공수업이나 과제물이 대학공부다워졌다면서 어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트이고 눈이 열리는 느낌이 든단다. 문화콘텐츠 기획자! 참 범위 방대하고, 손에 안 잡히고, 눈에 안 보이고, 머물지 않고 부유하는 그런 직업처럼 보인다. 한참을, 어쩌면 오래 배고플 수도 있겠다. 그래도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좀처럼 대체할 수는 없는 분야 같아서 희망적이다. ㅎㅎ
그리고 소미는 8월 말 여행에서 돌아오면 1년간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리라 벼르며 리스트를 만들고 있는데, 일단 9월 한 달은 더할 수 없이 집에서 뒹굴댕굴 하겠단다. 자기 인생에 부담 없이 그렇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에 꼭 한 달은 그렇게 지내겠다고 한다. 소은이 기말고사 시작하는 날 여행가방 싸며 난리하더니만, 소은이 대입 수시 넣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9월에 만고땡으로 뒹굴댕굴하겠다 하니 동생에게 참으로 잔인한 언니로다.
하지만 소은이는 소미가 없음을 좀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눈치다. 두 아이 사이엔 한해 동안 대단한 우정과 의리가 쌓이고 있는 게 보인다. 서로가 너무 달라 “저 사람은 왜 저러지?” 이러면서 티격태격할 때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감탄하는 어떤 부분들이 하나 이상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잘 아는데서 오는 친구 이상의 편안한 우정이 밤을 새며 대화하게 만든다. 대학생이 된 소미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자주 포착된다. 아이들은 이렇게 커버리고 있다. 하루 한 뼘, 아니 하루에도 몇 뼘씩 크는 게 보이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소미는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아직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빈에서 생일을 맞은 소미에게 소은이가 보낸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