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다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두 분을 사랑하지만 떠나요.
두 분은 이제 아이가 없는 거예요.
이런 가사로 노래가 시작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훅 눈물이 차올랐다. 프랑스의 국민가수 미셸 사르두의 ‘Je vole(비상)’를 10대 후반의 소녀가 부르는데 첫 소절부터 속절없이 마음을 후빈다. 부모 성장 영화로 본 ‘미라클 벨리에’의 클라이막스다. 처음으로 긴 시간 소미와 소은이가 모두 집에 없는 허전한 3주를 보내는 가운데, 이 영화는 깊은 여운을 주며 며칠째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는 교환학생을 마친 소미를 6월 3일 부다페스트에서 만났다. 노르웨이에서 짐을 싸서 바르셀로나-세비야-포르투-리스본을 거쳐 온 아이는 나를 만나 함께 부다페스트-비엔나-프라하-잘츠부르크를 여행했다. 28인치 큰 여행가방 하나에, 자물쇠를 야무지게 채운 꽉 찬 무거운 백팩을 메고, 작은 크로스백까지 하나 더 앞으로 매고 왔다. 이제 소미에겐 ‘독일 엄마’가 되어버린 오랜 나의 블친인 S언니 댁에서 함께 6일 정도 머무르다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다시 헤어졌다. 나는 서울로 소미는 이탈리아로.
서울로 돌아온 내게 소미는 펄펄 끓는 유럽의 이상 고온의 날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을 보내왔다. 이탈리아 피렌체-밀라노-베르가모-로마-베네치아에서 친구와 둘이, 때론 혼자 다니는 아이의 여정에 지나친 걱정을 억지로라도 덜어내 보이며 응원했다. 바티칸 입성을 감격스럽게 전하는 소미의 모습에 이상한 안도가 왔다. 날씨와 치안을 고려해 예정된 나폴리와 폼페이, 아테네를 과감히 포기하고 베네치아로 홀로 거슬러 올라간 아이는 이른 아침 아름다운 섬에서 혼자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혼자서도 잘 노는 너를 보며 놀라고 있다 하니 자기도 놀라고 있다 한다.
지금은 방학을 하고 날아간 소은이와 파리를 거쳐 벨기에 브뤼셀 쯤에 있다. 파리에선 디즈니랜드에 가고 그리 궁금했던 영화 ‘기생충’을 본다. 내일쯤은 본래 룩셈부르크를 가려고 했는데, 거길 포기하고 둘이 런던으로 날아가 웨스트앤드에서 뮤지컬을 본다고 한다. 뮤지컬 광팬 소은이를 배려한 맞춤여행인 듯 보인다. 런던에 유학 중인 소미 고교친구이자 소은이 선배인 아이가 그리 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위키드’와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마틸다’ 중 1편을 더 볼 거라고 신나있다.
소미는 교환학생으로 살던 중 맞은 부활절 방학 동안 오슬로-스톡홀름-헬싱키-코펜하겐까지 돌아보았으니 북유럽, 서유럽, 동유럽, 남유럽까지 듬성듬성이나마 꽤 많은 유럽의 도시들에 발자국을 찍은 셈이다. 대단하고 놀랍다. 나도 이번에 첫 유럽여행을 해보니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그 짐을 가지고 그렇게 다니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과 시간이 많아도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다. 유럽의 대도시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가 않았다.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동양인 여행객은 쉽게 소매치기 타깃이 된다. 우리도 한번 겪었다.
소미는 몇 개월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훌쩍 성장했다. 런던 공항에서 노르웨이까지 딱 1시간 반 만에 감쪽같이 사라진 작은 캐리어는 낯설고 물선 곳에서 시작하는 교환학생 생활 문턱에서 절망감을 안겨주더니 결국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교환학생 신분으로 보낸 5개월 여 동안 소미는 크게 세 가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된 시간이었다. 잃어버린 캐리어 속에 있던 1년간 쓴 다이어리 때문에 악몽까지 꾸면서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에 이어 여러모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것. 둘째, 유럽과 유럽인에 대한 모호한 환상을 버렸다. 물론 그들의 좋은 점도 많이 발견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유럽의 시스템과 유럽인이 그렇게 ‘나이스(Nice,이건 소미 표현인데 딱 맞는 우리말 표현을 못 찾은 것이리라)’하지만 않더라는 것. 아울러 우리 사회를 좀 더 긍정하고 재발견한 듯 보인다. 셋째, 영어는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 영어를 쓰는 환경 안에 있다고 어학 능력이 수월하게 생기는 게 아니고 그야말로 죽어라 해야 학문을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결론은 이 생각들이 앞으로 유학에 대한 고민을 실질적으로 냉정하게 하는 좋은 경험이 됐다고 했다.
사랑하는 부모님, 저는 떠나요.
두 분을 사랑하지만 떠나요.
두 분은 이제 아이가 없는 거예요.
오늘 저녁 저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날아오르는 거예요.
이해해주세요. 저는 나는 거예요.
(중략)
점점 조금씩 더 멀어지겠죠.
역 그리고 다음 역을 지나 대서양을 건너게 되겠죠.
날아오르는 소미가 보인다. 확실히 단단하고 강해졌지만 서서히 내 품을 빠져 가볍게 날아오르는 소미가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놓아야 할 어떤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지체 없이 놓겠다는 지금의 다짐을 증거로 남기듯 이 글을 쓴다. 잡지 않아야 한다. 내 경험을 들이대어 날개에 무거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자기 마음의 발로대로 나아가고 도전하고 경험하려는 선택을 기꺼이 격려하겠다는 지금의 충만한 다짐을 변함없이 갖기 위해 기록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놀랐다. 그런 불안감을 억지로 떨치기보다 자연스럽게 활용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소미는 현재 그런 아이다.
과거보다 테러의 위험도 크고 범죄도 급증한 유럽에서 딸이 그렇게 긴 시간 자주 홀로 여행하는 것을 두고 보는 게 불안하지 않냐 하는 사람이 있다. ‘미쳤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것까진 참는 것 같다. 불안할 때 많다. 하지만 모두 다 사람 사는 곳이다. 홀로 자신을 지키며 안전하게 여행하는 방법은 머릿속에 아무리 훌륭한 매뉴얼이 있다고 해도, 실전으로 익히지 않고는 어디 가서 다른 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베르가모에서 로마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중간에서 갈아타야 할 때 생긴 생애 최고의 공포와 위기의 장소를 피하는 방법도, 수하물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강구한 방법도, 더위 먹은 몸을 홀로 달래 회복하는 방법도, 캣콜링하는 남자들 앞을 무난히 지나가는 대처법도, 인종차별 하는 교수에 부당함을 표하는 방법도, 그리고 퍽 하면 고장 나고 연착되는 유럽의 기차를 견디는 방법까지도 또 어디선가 생각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의외의 쓸모를 발휘할지 모른다.
소미와 달리 유럽을 겁내하는 소은이는 언니가 있을 때 날아가야겠다 했다. 현실자매의 모습으론 좀체 드러내놓고 칭찬을 하지 않는데, 언니의 여정을 보며 ‘참 대단하긴 하다!’라며 도전과 용기, 실행력 인정한다. 소은이는 언니 덕을 톡톡히 보고 있고, 소미는 언니 노릇 제대로 하고 있을 뿌듯한 광경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어릴 때 소은이 학습지 공부 시켜주지 말라고 했던 소미가 생각났다. 자기보다 더 공부 많이 할 것 같은 동생 때문에 남몰래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던 소미가 여기서 여행 경험치로 한번 크게 치고 나간다. 그 귀여운 고백을 하며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난다. 무수한 박물관과 미술관 순례를 통해 전공수업 속에서 본 모래알 같이 많은 예술콘텐츠를 영접한 황홀을 유럽여행의 으뜸자산으로 꼽았으니 그 또한 심미안의 업그레이드일 것이다.
이제 한 일주일 후쯤엔 두 아이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김장김치 속을 털어서 나온 무채를 모아둔 게 있는데, 소미는 그걸 멸치나 돼지고기 넣고 물 자작하게 부어 자글자글 무르게 지진 것을 소울푸드라 한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먹고 싶었다는 그걸 해줘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