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표현하라!
오늘날 젊은 엄마들의 경험 보고서에는 ‘죄의식’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을 때가 거의 없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젖을 충분히 먹지 않았을 때, 너무 일찍 젖을 떼야 할 때, 수유가 고통스럽거나 귀찮을 때, 아이에 대해 항상 인내심을 유지할 수 없거나 친절하게 대할 수 없을 때, 아이를 잠깐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 아이의 성격이 원만치 않거나 칭얼댈 때,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아이보다 혹은 자신의 아이가 더 과격하거나 수줍음을 많이 타거나, 지능이 모자라거나 덜 사랑스러울 때 여자는 죄책감을 느낀다.
- 헤라드 쉔크(독일의 사회학자)
최근 나의 화두가 죄책감은 아니다. 그 정도로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나 미안함이 평소보다 좀더 무게감을 가진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 같다. 그 미안함을 일깨워준 사람이 날카로운 비판정신의 소유자(?) 일곱 살 소은이다.
소은이는 며칠 전 아파트 안에서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네 집에 생일초대를 받았다. 다른 친구 엄마를 통해서 나도 와서 차 한 잔 하라 했다기에 나도 소은이도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집을 가게 되었다. 케이크나 과일, 음료수 정도의 간단한 생일상을 생각했던 나는 생각 외로 크게 차린 생일상 앞에서 놀랐고, 그 비좁은 집안(우리집하고 똑같다)에 큼직한 상과 어른아이가 똑같은 비율로 뒤섞인 자리에 한참 동안 어디다 다리를 접고 앉아야할지 몰랐다.
그러나 곧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가 모두 컴퓨터게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몰려있었다. 거의가 남자아이들 틈에 소은이는 그나마 한둘 유치원에서 보았던 여자친구도 없으니 내 옆에서만 앉아서 잡채며 떡이며 집어먹었다. 나는 조금 안면이 있는 엄마하고만 이야기를 하다가 곧 두루 인사를 하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 이야기로만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돌아왔던 것 같다. 엄마들은 본래 아이들끼리 또래면 놀이터에서건, 유치원 앞에서건 자기들이 본래 친구였던 양 넙죽넙죽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는가. 그러나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세밀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이따금씩 와서 뭘 해달라거나 뭘 먹겠다거나 하면서 이야기를 끊기도 하고 적지 않게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걸레를 빨고 소은이는 내 등 뒤쪽에 있는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보고 있었다. 소은이는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시작하는 특징적인 말로 입을 열었다.
“엄마, 참 이상한 게 있어요.”
“뭔데?”
“엄마, 엄마들은 참 이상해요.”
“엄마들이? 왜에~?”
“엄마들은 왜 아이들 말할 때 왜 이런 거는 못해요, 이런 거는 나빠요, 이래서 미워요, 이래요?”
“엉?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열린 욕실 문 앞에서 종이접기를 하던 소미가 말했다.
“아, 엄마. 소은이는 엄마들이 모여서 자기 애들에 대해 말할 때 왜 잘하는 것, 칭찬해주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냐는 말 같애요. 그치? 소은아.”
나는 놀라서 거품인 고무장갑을 성급히 물에 풀어 씻어버리고 일어서서 소은이를 쳐다보았다. 소은이는 바로 그 말이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응” 그러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갑자기 확 당황되어 몇 초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늘 어땠더라? 무슨 말들을 나눴더라?… 머릿속에서 빠르게 필름 되감기를 하다가 잠시 후 자신 없는 목소리로 “엄마가 오늘 그랬어?”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엄마는 오늘은 안 그랬어요.”
“오늘은? 그럼 다른 때는 그랬어?”
“음. 쪼끔.”
소미에게도 물었다.
“소미가 소은이 말을 엄마보다 금방 알아듣는 거 보니 소미도 평소에 그런 거 느꼈나 보네. 맞아?”
“네…. 쪼끔.”
가슴이 뜨끔했다. 이건 쪼끔이 아니다. 휴~ 마음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아이들이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내가 남들 앞에서 저희들 칭찬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집안에서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데 집밖에선 인색하다는 것을. 나도 평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이 블로그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하던 때가 생각난다. 제1호 글에서도 그 비슷하게 적은 기억이 있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랬다고, 무조건 내 아이 이쁜 짓에 퍽 엎어져서 자화자찬하는 식의 글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의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나 신통하고 예쁘지, 다른 사람들도 모든 행동을 다 예쁘게 볼 리는 없겠단 생각 때문이다.
일견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제까지 아이들 밖에 나가서 하는 행동거지를 유난히 조심시키고 예절만큼은 좀 엄격하게 가르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게 활동량 많은 요즘 시기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조금 더 크면 부모의 긍정적인 권위마저도 먹히지 않을뿐더러 이런 습관들이기는 이미 물 건너간다. 엄마 아빠 말이 먹힐 때, 요때 제대로 잡아주지 않아 기본적인 생활습관이나 예절이 몸에 배지 않으면, 책 아무리 많이 읽고 공부 아무리 잘해도 ‘썩 괜찮은 어른’이 되는 일에 곱절의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한 아이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하곤 또 다르다. 이것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양과 기르는 문제지, 예의가 바르다고 착한 아이, 예의가 좀 없다고 나쁜 아이라는 단편적인 잣대로 말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평소 집에서 착하고 차분하고 귀여운데 집밖에 나와 남들 앞에서는 가끔 저렇게 버릇없이 할 아이가 아닌데 싶은 행동을 하는 아이도 많이 봤다. 가르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지 아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부분이 내게 엄마노릇 하면서 강박증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좀 편하게 해도 되는데, 다른 집 아이들은 이보다 좀 풀어두어도 사는데 문제없어 보이는데 싶은 것이다. 아파트 안의 슈퍼를 가도, 관리소장님을 만나도, 친구 엄마들을 만나도 소미 소은이 칭찬을 많이 듣지만, 팔불출 엄마 각오하고 그 칭찬을 인정하거나 다른 칭찬할 만한 부분을 찾아 이어서 말해본 적이 좀체 없다.
반대로 소미도 만만찮게 터프해요, 소은이는 고집이 세고 제 언니보다 산만해요, 도무지 엉덩이를 붙이고 진득하게 뭘 못하죠, 둘이 자매가 아니라 라이벌처럼 보일 때가 있을 정도로 너무 싸워서 속상해요,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와요, 등등 칭찬해주는 게 고마우면 고마운 거지, 왜 송구스런 마음까지 들면서 아이가 못하는 부분을 나도 모르게 들추어서 칭찬하는 말에 물타기를 하려고 드는 걸까? 이건 겸손이 아니라 병이다.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듬뿍 안겨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엄마를 보고 싶은데, 엄마는 집에서는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은데 남들 앞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블로그만 해도 여러분에게 공개되는 글이긴 하지만 어차피 내 아이들에게 선물이 될 성장기록이다. 너희가 사랑스럽고, 너희가 대견했고, 너희가 자랑스럽고, 너희가 엄마의 기쁨이었다…는 표현이 마음 안에는 가득해도 언제나 반쯤 잘라내고 절제할 때가 더 많았다. 실제로 그 부분을 지적해준 분도 계시다. 결국 재형님의 아이가 읽을 것인데 소미 소은이에게 이 담에 더 큰 기쁨의 선물이 되려면, 남 의식하지 말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다 담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는데 나는 아주 크게 공감했다.
이제 내 언니를 본 받겠다.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자랑에 자식자랑이 스스럼없는 사람이라 어떤 땐 눈꼴 실 때가 많지만(요 부분만 본받겠다), 나한테는 가끔 전화해서 무진장 무식해진다. 중학생인 자기 아들이 확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 싶을 정도로 밉다거나, 그래서 내내 쌓인 거 한바탕 뒤집어 놨다며 엄마는 엄마지 선생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가끔은 이래줘야 한다며 길길이 흥분하니, 낄낄… 그 잘난 척도 봐줄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