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원봉사
식목일 아침, 달콤한 늦잠의 유혹에 빠지기도 전에 남편은 부대에서 온 전화를 받더니 평상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갔다. 나와 아이들은 따사로운 봄볕의 유혹이 창을 통해 거실 바닥에 드리워지는데 이렇게 저렇게 어질러만 놓고 나른하게 시간을 없애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내게도 전화가 왔다. 필리핀에서 유학중인 수녀언니였다. 학교방학이 시작되어 며칠 전 귀국했는데 언니는 햇볕도 좋은 날 뭐하느냐, 아이들 보고 싶으니 데리고 나오라고 하였다. 귀국하고 아직 얼굴을 못 본 터라 반갑기도 하고, 내내 마음만 있다가 교황님 빈소가 차려진 성당에 들러 분향이라도 하고 올 수 있겠다 싶어서 기쁜 마음이 되었다.
명동 가톨릭회관에는 언니네 수도회의 아프리카잠비아선교후원회 사무실이 있다. 언니는 몇 해 전만 해도 잠비아에서 선교 소임을 맡아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곳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방학 중에 와있을 땐 여전히 이 사무실을 드나들며 모자라는 일손을 보탠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언니는 레오노라 수녀님과 열심히 후원회원에게 발송할 소식지와 지로용지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레오노라 수녀님은 벌써 발송해야 했는데 늦어졌다시며 소미 소은이를 한번씩 안아주시고 다시 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자원봉사는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시작되었다. 우리, 그 중에서도 소미 소은이가 할 수 있는 자원봉사로 정말 더할 수 없이 ‘딱이다’ 싶은 일이 그득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봉투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8절지 크기의 <징검다리>라는 소식지를 세 번 접는 일이다. 난 아이들에게 후원회원이 무엇인지, 이 소식지를 왜 후원회원들에게 보내는 건지 설명해주고 잘 접으라고 일렀다. 좀 어려운 종이접기도 제법 잘하는 아이들에게 네 귀를 맞추어 사각으로 접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일도 한두 장 접는 일이 아니니 쉬울 리가 없다. 계속되는 단순한 작업은 아이들이 더 쉽게 싫증을 내기도 한다. 소은이는 어느 정도 하다가 쓸쓸 딴소리를 하면서 손을 쉬는 경우가 많았다. 하긴 이 일은 수녀님들이 사흘은 꼬박 매달려야 하는 일이란다. 매달 그렇게 작업해서 보내야 하니 그 공이 만만치 않다.
“수녀님, 지로용지 정리 작업이라도 줄게 회원들에게 처음부터 자동이체를 강제조항에 넣으세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계속 소식지에 그 부분을 부탁하는데도 좀체 잘 안 된다고 하셨다. 어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난 시어머님 후원금도 내가 자동이체를 해드렸다. 후원금은 다 자기 형편껏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후원을 하겠다고 해놓고 한번도 하지 않거나 조금 하다가 마는 사람도 많은데, 아직도 많은 후원회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이 참에 후원금을 100%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후에 수녀언니가 잠비아에서 알게 되었다는 젊은 부부가 방문했다. 물론 한국인인데 이들의 손이 보태지자 일이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내는 이제 임신 4개월로 입덧이 너무 심해 몸이 힘들 텐데도 밝은 얼굴로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소미 소은이는 이런 저런 동요를 부르며 신나게 한참을 잘했다. 우리들은 태중의 아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웃었다. 느린 템포의 노래를 부를 땐 손놀림이 좀 느려지고 빠른 템포의 노래를 부를 땐 반대로 빨라졌다.
우리는 대단하게 많이 하지도 못했으면서 수녀님에게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내가 사드리려고 했으나 결국 수녀님이 사셨으니 이걸 두고 자원봉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 도둑놈 심보다. 짜장면 한 그릇을 둘이 나눠먹고 행복해진 소미 소은이는 곧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했다. 난 소미에게 다음에도 소식지 접으러 오는 것 어떠냐고 했다. 주일학교 친구인 하현이도 함께 데려오자 했더니 더 얼굴이 밝아졌다. 다음에 갈 땐 모두 밥 든든히 먹고 간식까지 챙겨 싸들고 와서 해야겠다. 말만 보드라운 '자원봉사’가 민폐까지 되어서는 안 되겠다.***
명동성당을 뒤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