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여행이란...
어둠이 걷히려면 아직 기다려야 할 시간. 깨우는 소리에 졸린 눈을 비벼 일어서면 엄마는 며칠 전 사두었던
예쁜 옷을 입히시고 아버지에겐 양복을 챙겨드렸다. 그리고 당신이 한복을 챙겨 입으시면 준비는 끝난다. 시골 우리 동네에서 출발하는 첫 버스를
타고 어떤 땐 동도 트지 않은 시간에 어둠에 스미듯 묻히듯, 큰집이 있던 남원으로 이모들이 사시는 부산으로 그렇게 긴 여행을
시작했다.
막내였던 나는 오랫동안 부모님의 장거리 나들이에 동행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는데, 기차에선 절대 홍익회 수레에 눈길도 주지 않으시면서, 고속버스 휴게소에서는 샌드위치며(아버지가 좋아하셨다) 음료수를 사서 손에 들려주시기도 했다. 아버지 월급으로 여덟식구가 살아야했던 팍팍한 살림살이였음에도 이런 여행은 내 어린시절을 풍요롭고 화목하게 추억하게 한다. 이때가 내 나이 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예닐곱 살 무렵이다. 그 시기의 다른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는 부모님하고 나들이한 것은 비교적 또렷하게 자잘한 에피소드까지 섞어서 기억한다.
교통사고 나신 큰 이모 뵈러 부산 갔다가 사촌오빠가 내게 잘 익어 벌어진 석류를 가지째 선물했던 일. 처음 보는 신기하고 예쁜 과일은 여행 중 가장 오랜 추억으로 남아있다. 용두산 공원에서 이종사촌들과 쪼로록 서서 부동자세로 사진 찍던 일. 남원에선 얼음공장으로 네모난 큰 얼음을 사러 가는 사촌오빠의 자전거 뒤꽁무니에 실려 가던 일.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남원은 자전거를 타는 인구가 아주 많았는데 자전거 타고 신나게 큰집에선 꽤 먼 광한루까지 다녀온 것이 기억난다. 내 이런 추억과 기억의 조각들은 모두 지금의 소은이 나이만 할 때 찍힌 이미지다.
어제 2박 3일의 여행에서 돌아왔다. 9인승 차 한 대에 8명이 함께 경주와 부산을 두루 다녀왔다. 우리
네 식구와 나와 남편의 초, 중학교 친구 두 명, 언니 둘. 가족여행에 친구들이 끼어 붙은 것인지, 동창여행에 언니들이 끼어 붙은 것인지,
자매들 여행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 붙은 것이지 모를 모호한 성격의 여행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일상을 함께 벗어나서 함께 꽃바람, 바닷바람
쐬자고 의기투합 한 것을.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는 몸이 고단하다 싶더니 도로 눕고 싶은 것 좀 참고 밥 한 술 먹고 열심히 빨래해 널고 커피 한 잔 마시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가벼워진다. 이런 때 나의 ‘레저용 몸’이 실감난다. 소미 소은이 역시 어제 저녁 올라올 때부터 일찌감치 잠들어서 그런지 아침 일찍 수월하게 일어나 컨디션 좋은 얼굴로 학교와 유치원에 갔다.
아이들은 여행의 의미를 잘 모른다. 또 어딜 다녀와도 무엇을 보고 와도 이내 곧 잊기 쉽다. 어른들의 여정에 힘이 부칠 수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오래 걷는 일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 있다. 그런데도 어디 휘리릭 다녀오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 나와 남편은 아이들 어릴 때부터 아기바구니나 캐리어(배낭처럼 생긴 것에 아이 태워서 메고 다니는 것)에 담아서 그렇게 무수히 다녔다. 동강 어라연 가는 그 긴 길목을 남편은 소미를 캐리어 태우고, 나는 태중 7개월의 소은이 때문에 부른 배를 안고 천천히 걸어서 다녀왔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긴 여행을 다녀도 아무데서나 잘 자고 집에서보다 훨씬 잘 먹고 잘 따라다닌다. 소은이가
최근 걷는 걸 싫어해서 여행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면 꽁무니를 빼지만(빼봐야 소용없지만) 일단 출발해서 다니면 별로 힘들게 하지 않고 잘 다니며
즐거워한다. 소미는 말할 것도 없이 길 떠나는 걸 무척 좋아한다. 현장학습 신청서를 내놓은 토요일에 하필 학교에선 소미가 너무 좋아하는
과학행사를 하는 바람에 못내 아쉬워하며 길을 떠났는데 나는 솔직히 정규수업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더 가벼웠다.
우리는 어른이 여섯 명이었으나 충분히 어린 소미 소은이를 배려해서 여행계획을 짰다. 얼핏 아이들을 위해서는 유적지 답사가 촘촘해야 좋을 것 같지만 우리는 무리한 유적지 답사는 거의 없앴다. 앞으로 유적지여행은 기회가 많을 것이고 특히 소은이에겐 너무 지루한 일이다. 그 대신 선선하고 여유 있게 즐기는 여행을 계획했다. 경주 벚꽃을 즐기며 자전거 타기, 대왕암이 있는 감포 앞바다에 가서 파도와 갈매기와 놀며 모래 위에 글씨쓰기 같은 걸로 시간을 많이 썼다.
아이들은 너무 신나고 즐거워했다. 그래서 ‘전국적인 비’ 예보는 우리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 없었다. 정말 수많은 여행을 비와 함께 해서 이제 뭐 그러려니, 겁도 안 나고 자연스럽다. 더구나 이미 아이들 비옷에 장화까지 단단히 싸들고 나섰는데 뭐가 두려우랴. 파도에 발이 빠지는 일이 아이들에겐 더 큰 기쁨이다.
이런 여행을 통해 아이들은 자연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들여 몸과 정신을 생기롭게 할 줄 알고, 사람들과 편안하고 즐겁게 소통할 줄 아는 힘을 조금씩 기른다. 이것은 두고두고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이 다음에 커서 자주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남루함과 밋밋함, 혹은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조금 더 쉽게 훌훌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나 내가 그런 것처럼 아이들에게 여행이 특별하고 거창한 ‘행사’가 아니라 생활이고 습관이 되게 하고 싶은 이유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행을 통해서 풍경이나 유적지를 감상하는 일만큼 좋은 삶의 자세를 배운다. 특히
가족들만의 여행이 아닌 다양한 동행자 사이에서 일찌감치 타인을 배려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을 배우고, 불편한 점이 있어도 조금 참을 줄 알고,
하기 싫은 일도 때로는 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을 기다려 줄줄 아는 참을성이 생긴다.
좀더 훌쩍 커버리면 아이들이 우리 따라나서는 일도 점점 줄어들 텐데 그 때문인지 지금이 참 좋다. 가족여행은 가족여행대로 편하고 안온한 여행이라 좋지만, 또 이런 여행은 운전도 나누어서 하고 이야기꽃도 무궁무진해서 활력과 웃음이 넘친다. 아이들은 그 가운데서 의도하지 않고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두루 배우고 좋은 기운을 받으니 그 맛이 여러모로 참 색다르다.
소미는 오늘 아침 기념품으로 사가지고 온 경주 ‘황남빵’을 들고 아주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작은 상자 하나는 선생님께 드리고, 또 조금 큰 상자는 1교시 끝나고 우유 먹는 시간에 반 친구들에게 한 개씩이나마 나누어서 맛보게 하라고 했다. 그럼 소미는 친구들에게 토요일 날 학교 빠진 설명을 자연스럽고 근사하게 하는 셈이 되겠고,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겐 작게나마 여행의 뒤풀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
* 이번 여행은 삐수니님의 블로그에 들어가시면 풍부한 사진과 에피소드로 좀더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