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0만에서 두 명 빠진 함성
4시부터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반찬 고민도 덜고 간단하게 먹기 좋은 김밥과 오이냉국을 준비하자 해서 일찍 재료를
준비했다. 늘 넣던 햄을 빼고 모처럼 쇠고기로 불고기 양념해서 볶아 넣을 작정이었다. 먼저 오이냉국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밥을 해서 미리
식히면서 속재료를 준비했다.
내가 축구경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벌렁거리며 부산하기는 처음이다. 난 좀 '몸치'라서 어릴 때부터 체육은 젬병이었고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 심지어 손가락으로 하는 공기놀이 같은 것도 잘 못했다. 그러다 보니 스포츠엔 관심도 없고 일요일 낮에 스포츠 경기하는 텔레비전을 제일 따분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어른이 되어 그나마 좀 재미를 붙였던 것이(잘 한다는 말은 아니다) 볼링이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안 한다. "엄마, 오늘 우리 나라 축구 하는 거예요? 그럼 막 응원해야겠네요. 그치요?" 그런데 우리 두 딸들은 축구를 잘 모른다. 아니 아주 모른다. 소은이는 그렇다 치고 소미도 남편이 설명을 해줘도 잘 모르겠다고만 했다. 공이 골대로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다는 것은 아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 이쪽저쪽 상대 골대에만 죽기살기로 넣으려는 까닭을 잘 몰랐다. 계속 그냥 아무 데나 넣으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모르겠다고 방으로 휙 들어가 인형놀이에 열중이었다. 나는 그냥 바빴다. 좀 아무 것도 방해받지 않고 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최근 남편에게 이것저것 룰도 얻어듣고 자꾸 다른 나라 경기도 보고 하니까 이제 축구 보는 재미를 좀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한 경기가 너무도 길었던 축구와 야구가 아주 제일 따분한 경기로만 생각되어 시간이 무던히도 안 가는 것 같더니, 이젠 어느 정도 즐기다보면 쓱 45분이 흘러가는 것 같다. 월드컵이 참 무서웠다. 나 같은 '스포츠 문외한'에게 이런 즐거움을 주니 말이다. 등에 땀이 배도록 뚝딱 7시에 밥상 물리고 설거지하고, 애들 어질러놓은 것 치우고, 집안에 청소기 한번 씽∼ 돌리고, 애들 방에 이불 미리 좌악 깔아놓고, 소미 부리나케 씻기고, 수박 또각또각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 큰 접시에 수북히 쌓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가 이럴진대 선수들 가족은 어떨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편도 오늘 부대에서 축구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했다. 또 병사들도 모두 경기관람을 할 수 있게 일과조정이 되어있다고 했다. 폴란드와의 경기는 시작되었고 난 벌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수박을 우적우적 먹다가 애꿎은 포크만 힘주어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바로 경기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다짐했던 딸들이 배신을 하기 시작했다. 축구를 보기는커녕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꽤 크게 소리를 높여둔 중계방송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떠들고 싸우다가 텔레비전을 막아서기까지 했다. 우리 부부는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서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뭐 도무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 요것들이 가만히 잘 있다가 웬 난리람. 내가 이 시간을 위해서 오늘 오후를 그리도 종종댔는데…… 너희들 정말 조용히 못해? 으∼증말! 우리 나라 이기라고 응원한다며? 너희들 이러면 진짜 진단 말이야. 어서 소미, 소은이 아까 연습한 대로 응원해. 빨리!" 그랬더니 들은 척도 안 하고 소미가 이제 나더러 글쎄 재워달라며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 또 한몫을 거들었다. 하도 허둥거려서 등에 난 땀도 채 개지 않았는데 소미는 후텁지근한 내 몸에 들러붙었다. 방에 가서 자라고 호통을 냅다 쳤더니 결국 제 아빠 무릎에서 편치도 않은 이상한 포즈로 금방 잠들었다. 9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병 소은이가 난데없이 그림책 하나를 들고 와서 읽어달라는 게 아닌가. 축구 봐야 해서 지금은 못 읽어주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전반전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해도 역시 막무가내였다. 계속 읽어달라고 떠들어대는데 그때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냉장고에 있는 얼음과자. 과일맛이 나는 작은 얼음 덩어리를 그릇에 덜어서 수저와 함께 내밀었더니 그때부터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아주 찍 소리도 안한 채 얌전히 앉아 그것만 먹고 있었다. 점점 다 먹어갈 무렵 이제 뭘로 이 평화를 유지하나 불안하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얼음과자가 무슨 얌전해지는 약이라도 되는 듯 소은이는 인형만 하나 끌어안고 가만히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더니 그냥 그대로 잠들었다. 이도 못 닦고 입 주변은 끈끈한 채로. 아이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오버액션으로 정신을 뺀다. 내내 조용하다가도 중요한 무슨 일을 할라치면 먼저 나서서 방해공작을 편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첫인상 관리는커녕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좀 더 어릴 때도 모처럼 신경 써서 차려입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막 집을 나서려고 하면 꼭 똥을 싸서 뭉개거나 무언가를 엎질러서 사고를 친다. 어쨌든 우리 나라 선수들은 감격의 승리를 했다. 뉴스는 4500만이 함께 하나되어 일구어낸 귀중한 첫승이라고 보도하는데, 우리 딸들은 응원은 고사하고 내내 떠들고 사고 치다가 일찍 잠들었으니 사실 4500만에서 두 명 빠졌다고 봐야 옳다. 흐흐,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우리 부부가 두 딸들 몫까지 채워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으니 함성소리는 완벽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