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학교
모교가 보이는 이층집에서 보낸 여름 오후
M.미카엘라
2000. 8. 23. 00:41
지난 주말과 휴일에 친정을 다녀왔다. 큰오빠가 뇌수술 후 첫 생일을 맞기도 하고,
나도 4,5개월 동안 친정엘 못 가서 그참저참 갈 마음을 먹었다. 남편은 토요일 근무여서
금요일 오후에 언니가 나와 소미, 소은이를 데리러 왔다.
토요일 오후에는 미리 약속을 해두었던 친구들과 만났다. 나를 포함해 20년 지기
세 친구들이 모두 친정이 같은 동네라도 참 같이 만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주
사는 친구가 친정 아버님 기일이라 친정엘 간다고 했다. 내가 때마침 가게 되었으니
이런 좋은 기회가 없었다. 회포를 풀자하고 우리가 나온 시골 중학교가 빤히 보이는
곳에다가 예쁜 이층집을 짓고,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친구 집에서 모였다.
이 친구는 20년 지기가 아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막역한 사이니 25년은 족히 넘게
알고 지냈다. 특히 연로하신 내 부모님과 그 친구 부모님이 같은 연배시면서 부모님
들끼리도 교류가 있으셔서 어릴 때부터 아주 친했다. 얼마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부모님이 없는 막내며느리인 이 친구는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산다.
이 친구가 낳은 남매까지 합해서 그날 이층에서 북적이던 아이들은 모두 다섯.
태어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단하: 만 40개월. 소미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큼.
*소미: 만 37개월. 또래보다 작음.
*민지: 만 25개월. 작고 하얗고 여려서 아기 같지만 말이 아주 빠름.
*소은: 만 13개월 20일.
*진수: 만 8개월. 소은이보다 더 크고 아주 순함.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들이 무슨 회포를 풀겠는가. 집은 넓고 시원했지만 처음
만난 세 아이들 찌구락짜구락하는 것 조율하랴, 소은이 계단 아래로 떨어질까
감시하랴, 진수 안아주랴 처음 한두 시간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진수는 너무 어리고 소은이는 조금 걷게 되었지만 언니들 틈에 끼긴 아직 터무니
없음을 저도 아는지 혼자서 뛰뚱뛰둥 걸으면서 잘 놀았다. 단하, 소미, 민지는 처음엔
잘 노는가 싶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문제가 드러났다.
나는 소미가 누구하고도 잘 놀 거라고 믿었다. 단하는 소미가 어릴 때 잠깐 보았지만
자기와 또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잘 놀 거라고 생각했고, 민지와는 만난 지 한
달도 채 못되어서 그때 잘 놀았던 기억으로 역시 오늘도 잘 놀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미는 처졌다. 의외로 단하와 민지가 너무 다정하게 잘 놀았다. 소미는 시샘도
나고 낄 틈도 잘 찾지 못하겠고 하니까 자꾸만 외할머니 집에 가지고 졸랐다.
"소미야, 엄마하고 이 이모들하고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더 놀다 가야지. 엄마는
이모들하고 아직 할 말도 많고 더 있다가 가고 싶어."
이렇게 살살 달랬지만 계속 가자고 졸랐다. 나는 몇 번 달래다가 은근히 속으로
화가 나서 심란해졌다. 오히려 가운데서 이리저리 어울려 잘 놀 수 있을 텐데 저렇게
바보같이 처져서 징징대나 싶은 게 짜증과 부아가 났다.
그런데 금방 '셋' '3'이 문제인 걸 깨달았다. 어른들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셋이서 오랫동안 친하기가 힘들다. 하물며 어린아이들은 오죽할까. 서로서로 한
명씩 집중하며 놀기가 좋지, 셋이서 두루두루 잘 놀기엔 단하나 소미, 민지가
아직 턱없이 어렸다. 우리 나라 사람들 '3'이 '복삼'자라고 하면서 이 숫자를 꽤나
좋아하는데 어린아이들 사이에선 오히려 '4'자가 복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
비슷한 또래로 여자 아이 하나가 더 있었다면 그리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소미의 문제는 조금 있다가 해결되었다. 민지는 웬일인지 우리가 원주 자기네
집에 갔을 때부터 소은이를 싫어했다. 가만히 보니 언니들한테는 전혀 안 그러는데
유독 자기보다 어린아이에게 샘을 냈다. 소은이가 자기 엄마 무릎도 못 만지게
했고 옷자락도 못 건드리게 하면서 "아가 엄마 아니야. 민지 엄마야"하며
앙징맞게 종알댔다.
그런데 눈치 없는 소은이는 이 민지 에미를 너무 좋아하는 빛이니 원! 자꾸 흔들
의자에 앉아있는 민지 에미에게 가서 한번 안아줄 것을 애원하니, 이 민지 에미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덜컥 안아준 것이 사단이었다. 민지는 펄펄 뛰며 울다가
바닥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울었는데 내가 안고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간신히
소은이를 내려놓고 제 엄마가 안고 달래서야 진정되었다.
그후 마음이 틀어졌는지 불안해선지 놀지도 않고 제 엄마 무릎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소미에겐 전화위복이 되고야 말았다. 단하와 소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거의 환상적으로 잘 놀았다. 곧이어 둘은 장난감이 있는 방에
들어가선 문까지 잠그고 나오질 않았다. 잘 보니 단하가 워낙 성격이 유순하고
둥글둥글해서 누구와도 잘 지냈다.
민지가 잠들고 소은이까지 잠든 후 우리들에게 비로소 조촐한 평화가 찾아왔다.
문을 활짝 열고 아름답게 자리잡은 우리의 모교를 내려다보며 옛 일들을 떠올렸다.
학교 옆 사과나무 과수원 없어진 것이 서운했지만 더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모습이 좋았다. 학교 뒤편 아래에 강도 하나 흐른다.
나는 가슴이 찡하게 좋아서 친구더러 단하도 이 중학교에 보내라고 했더니 아직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나쁘지도 않겠다고 했다. 나는 "뭐가 문제냐, 이렇게 좋은
곳에 자리한 이 예쁜 집도 너희 집이고, 남편의 직장도 건실하고 가까운데…"
하며 꼭 여기에 보내라고 했다. 시골 중학교라고 학습환경을 문제삼을 일은
없다. 유해환경이 오히려 거의 없다. 우리 모교 선배, 후배, 동기생들 중엔 좋은
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아주 많다.
나는 단하가 우리처럼 아주 즐겁게 많은 꿈을 가지고 이 학교를 다니는 예쁜 여학생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들은 정말 이 학교를 다니며 공유한 아름다운 추억이
너무 많다. 그것이 마음 바탕의 밑거름이 되어 이렇게 아이들을 낳고도 그에
걸맞는 꽤 괜찮은 감성을 소유한 아이어멈들이 되었다고 믿는다. 나 역시 여기서
오래 살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 소미와 소은이를 내 모교에 보내고 싶다.
나도 4,5개월 동안 친정엘 못 가서 그참저참 갈 마음을 먹었다. 남편은 토요일 근무여서
금요일 오후에 언니가 나와 소미, 소은이를 데리러 왔다.
토요일 오후에는 미리 약속을 해두었던 친구들과 만났다. 나를 포함해 20년 지기
세 친구들이 모두 친정이 같은 동네라도 참 같이 만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주
사는 친구가 친정 아버님 기일이라 친정엘 간다고 했다. 내가 때마침 가게 되었으니
이런 좋은 기회가 없었다. 회포를 풀자하고 우리가 나온 시골 중학교가 빤히 보이는
곳에다가 예쁜 이층집을 짓고,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친구 집에서 모였다.
이 친구는 20년 지기가 아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막역한 사이니 25년은 족히 넘게
알고 지냈다. 특히 연로하신 내 부모님과 그 친구 부모님이 같은 연배시면서 부모님
들끼리도 교류가 있으셔서 어릴 때부터 아주 친했다. 얼마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부모님이 없는 막내며느리인 이 친구는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산다.
이 친구가 낳은 남매까지 합해서 그날 이층에서 북적이던 아이들은 모두 다섯.
태어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단하: 만 40개월. 소미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큼.
*소미: 만 37개월. 또래보다 작음.
*민지: 만 25개월. 작고 하얗고 여려서 아기 같지만 말이 아주 빠름.
*소은: 만 13개월 20일.
*진수: 만 8개월. 소은이보다 더 크고 아주 순함.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들이 무슨 회포를 풀겠는가. 집은 넓고 시원했지만 처음
만난 세 아이들 찌구락짜구락하는 것 조율하랴, 소은이 계단 아래로 떨어질까
감시하랴, 진수 안아주랴 처음 한두 시간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진수는 너무 어리고 소은이는 조금 걷게 되었지만 언니들 틈에 끼긴 아직 터무니
없음을 저도 아는지 혼자서 뛰뚱뛰둥 걸으면서 잘 놀았다. 단하, 소미, 민지는 처음엔
잘 노는가 싶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문제가 드러났다.
나는 소미가 누구하고도 잘 놀 거라고 믿었다. 단하는 소미가 어릴 때 잠깐 보았지만
자기와 또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잘 놀 거라고 생각했고, 민지와는 만난 지 한
달도 채 못되어서 그때 잘 놀았던 기억으로 역시 오늘도 잘 놀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미는 처졌다. 의외로 단하와 민지가 너무 다정하게 잘 놀았다. 소미는 시샘도
나고 낄 틈도 잘 찾지 못하겠고 하니까 자꾸만 외할머니 집에 가지고 졸랐다.
"소미야, 엄마하고 이 이모들하고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더 놀다 가야지. 엄마는
이모들하고 아직 할 말도 많고 더 있다가 가고 싶어."
이렇게 살살 달랬지만 계속 가자고 졸랐다. 나는 몇 번 달래다가 은근히 속으로
화가 나서 심란해졌다. 오히려 가운데서 이리저리 어울려 잘 놀 수 있을 텐데 저렇게
바보같이 처져서 징징대나 싶은 게 짜증과 부아가 났다.
그런데 금방 '셋' '3'이 문제인 걸 깨달았다. 어른들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셋이서 오랫동안 친하기가 힘들다. 하물며 어린아이들은 오죽할까. 서로서로 한
명씩 집중하며 놀기가 좋지, 셋이서 두루두루 잘 놀기엔 단하나 소미, 민지가
아직 턱없이 어렸다. 우리 나라 사람들 '3'이 '복삼'자라고 하면서 이 숫자를 꽤나
좋아하는데 어린아이들 사이에선 오히려 '4'자가 복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에
비슷한 또래로 여자 아이 하나가 더 있었다면 그리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소미의 문제는 조금 있다가 해결되었다. 민지는 웬일인지 우리가 원주 자기네
집에 갔을 때부터 소은이를 싫어했다. 가만히 보니 언니들한테는 전혀 안 그러는데
유독 자기보다 어린아이에게 샘을 냈다. 소은이가 자기 엄마 무릎도 못 만지게
했고 옷자락도 못 건드리게 하면서 "아가 엄마 아니야. 민지 엄마야"하며
앙징맞게 종알댔다.
그런데 눈치 없는 소은이는 이 민지 에미를 너무 좋아하는 빛이니 원! 자꾸 흔들
의자에 앉아있는 민지 에미에게 가서 한번 안아줄 것을 애원하니, 이 민지 에미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덜컥 안아준 것이 사단이었다. 민지는 펄펄 뛰며 울다가
바닥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울었는데 내가 안고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간신히
소은이를 내려놓고 제 엄마가 안고 달래서야 진정되었다.
그후 마음이 틀어졌는지 불안해선지 놀지도 않고 제 엄마 무릎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소미에겐 전화위복이 되고야 말았다. 단하와 소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거의 환상적으로 잘 놀았다. 곧이어 둘은 장난감이 있는 방에
들어가선 문까지 잠그고 나오질 않았다. 잘 보니 단하가 워낙 성격이 유순하고
둥글둥글해서 누구와도 잘 지냈다.
민지가 잠들고 소은이까지 잠든 후 우리들에게 비로소 조촐한 평화가 찾아왔다.
문을 활짝 열고 아름답게 자리잡은 우리의 모교를 내려다보며 옛 일들을 떠올렸다.
학교 옆 사과나무 과수원 없어진 것이 서운했지만 더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모습이 좋았다. 학교 뒤편 아래에 강도 하나 흐른다.
나는 가슴이 찡하게 좋아서 친구더러 단하도 이 중학교에 보내라고 했더니 아직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나쁘지도 않겠다고 했다. 나는 "뭐가 문제냐, 이렇게 좋은
곳에 자리한 이 예쁜 집도 너희 집이고, 남편의 직장도 건실하고 가까운데…"
하며 꼭 여기에 보내라고 했다. 시골 중학교라고 학습환경을 문제삼을 일은
없다. 유해환경이 오히려 거의 없다. 우리 모교 선배, 후배, 동기생들 중엔 좋은
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아주 많다.
나는 단하가 우리처럼 아주 즐겁게 많은 꿈을 가지고 이 학교를 다니는 예쁜 여학생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들은 정말 이 학교를 다니며 공유한 아름다운 추억이
너무 많다. 그것이 마음 바탕의 밑거름이 되어 이렇게 아이들을 낳고도 그에
걸맞는 꽤 괜찮은 감성을 소유한 아이어멈들이 되었다고 믿는다. 나 역시 여기서
오래 살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 소미와 소은이를 내 모교에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