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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집 때문에 죽겠는 거 알아요?”
4월 초쯤이었던 듯 싶다. 우리 동네에서 소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S의 엄마를 아이들 학교버스 태워주다 만났는데, 본 김에 하소연한다는 듯 내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두 집을 오가며 노는 과정에서 저희들끼리 대화든 어른이 물어서든 각자 집안의 대소사며 주말계획 같은 것을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S가 늘 우리집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소미네는 여행간대 엄마. 우리 집처럼 할머니네나 친척집, 아빠 엄마 만나야 할 사람 만나러 가는 여행이 아니고 그냥 가는 여행이래. 이모도 가고 아빠하고 엄마 학교 때 친구도 같이 간대.
엄마, 우리도 대장금파크 가자. 소미는 엄마가 한복 입고 가자고 그랬대. 맨날 대장금 놀이 집에서만 했는데, 소미는 좋겠다. 우리도 가자 엄마.
엄마, 소미네는 부자고 우린 가난해. 왜냐구? 으응… 그냥 부잔 거 같애.
엄마, 난 너무 공부 같은 거 많이 하니까 맨날 소미하고 놀 시간이 부족해. 소미는 학교 끝나고 바로 피아노 하고 돌아오면 아무 때나 놀 수 있다는데. 엄마 때문에 난 소미하고 놀 시간이 없어.
소미는 어제 아빠 엄마랑 극장에 가서 영화 봤대. 소미네는 책도 많아. (S네도 책이 많다.)
S는 많은 부분 소미나 우리 집과 견주어 부러워하고 엄마에게 조른다는 하소연이었다. S의 엄마는 해달라는 것도 잘 해주고, 수영장이며 놀이공원도 데리고 가고, 소미이모에게 부탁해서 그 예쁜 드레스까지 맞춰주었고, 여행은 S의 아빠(역시 군인이다) 휴가 때면 저 아랫녘에 사시는 양가 부모님 뵈러 가느라 아이 말대로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소미소은아, 너희들 S네 집에 가면 그렇게 자랑쟁이처럼 구니? 맨날 우리 뭐했다~ 우리 어디 갈 거다~ 우리 뭐 먹고 왔다~ 맨날 그런 말 빠뜨리지 않고 자랑하니? 아우~ 그럼 안돼. 그거 되게 미운 거야.”
“아니예요 엄마. 우린 자랑 안 해요. 그게 뭐 자랑할 일이예요? 그냥 무슨 말하다가, 아니면 놀다가 그런 말 하는 거예요. 그치 소은아?”
제법 어른 같은 소리 한다 싶은데 다시 소미가 말했다.
“엄마, 우리가 아니고 S가 얼마나 자랑쟁인데요. 맨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어제 빕스(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밥 먹었다, 엄마가 뭐 사준댔다 하는 애가 S라구요.”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 S가 놀러왔다가 부엌에서 쌀을 씻고 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소미이모, 오늘 저녁반찬은 뭐예요오?”
“으응, 된장찌개 끓이고 달걀찜 할 건데… 왜에? 아, 참! S야, 오늘 아저씨도 밤 근무시라 안 오시는데 엄마한테 말씀드리고 소미소은이랑 같이 저녁 밥 먹을래?”
“아니요, 사실 오늘 저는 엄마가 빕스에 데리고 가주신다고 그랬거든요.”
소미 소은이는 ‘빕스’가 어떤 식당인지도 모를 때였다. 나도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S가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반면, 다른 아이들보다 좀더 무엇인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많다는 생각. 그 이후에도 제 이모 이야기, 아빠 이야기, 엄마가 뭐 해주겠다고 한 말, 뭐 사주었다는 말, 어디 갔다 왔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 S가 놀러 왔길래 물었다.
“어제 엄마하고 통화했는데 많이 아프신 것 같더라. S야, 엄마는 좀 괜찮으시니? 소은이가 그러는데 오늘 Y(S의 남동생, 소은이랑 같은 유치원 다닌다)도 감기 걸려서 못 왔다던데.”
“네. 아직도 아프세요. 그래서요, 아빠가 학교 가지 말고 엄마하고 동생 간호하라고 해서 학교에 안 갔어요.”
“오늘? 학교 안 갔어?”
“네. 사실은 어제부터 안 갔어요.”
“그으래? 이틀씩이나 학굘 안 가고 엄마하고 동생 간호했어? 아이구, 네가 학교를 안 갈 정도면 엄마가 무척 아프시구나. 근데 학교를 안 보낸 아빠도 대단하시고…… 어린 너도 많이 애썼겠다. 대단하다 S야. 그런데 그럴 땐 나를 좀 부르지.”
“근데 이제 많이 나으셨어요.”
나는 좀 이상하다 하면서도 저녁준비에 바빴기 때문에 그걸 의심까지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시간 후 딸을 데리러 온 S엄마에게 내가 “많이 아프셨어요? S가 이틀씩이나 학교를 안 갔다면서요?”하고 묻는 바람에 산통이 깨졌다. S엄마는 당황하며 S에게 무슨 말이야, 소미이모한테 바르게 말해라, 너 그거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다그쳤지만, 순간 산통을 깬 당사자인 나는 더 당황스러워 일단 나중에 보자는 얼굴로 좋게 보냈다.
나는 이틀을 머리 복잡하게 보냈다. 두 모녀가 어떻게 이 사건을 처리했는지도 궁금하고 S가 내게 한 말을 제 엄마에게 바른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했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도 궁금했다. S는 소미와 같은 유치원을 2년 동안 다녔고 지금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지만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만나서 놀고 주일학교도 같이 간다. 그만큼 가깝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 사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턴가 감히 내가 애를 셋 기른다고 여기고 있다.
일요일 오후, 셋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더러워진 몰골을 하고 있으면, S의 엄마는 자신은 먼저 목욕탕 다녀왔는데 미안해서 어쩌냐고 하지만, 별로 부담 없이 셋 다 데리고 목욕탕을 다녀온 적도 있다. 물놀이인지 목욕인지 알 수 없지만 같이 또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세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함성까지 지를 정도였다. 명동성당 갔다가 성물판매소에서 아이들이 예쁜 천사스티커 사고 싶다고 하면 S의 것도 하나 더 사서 주라 했고, 요즘 애어른할 것 없이 여성들 사이에 아주 인기 만발인 말랑말랑하고 쌈직한 젤리슈즈를 소미소은이 사주면서 S의 것으로 하나 더 샀다.
아이들은 상황이 난감하면 어쩔 수 없으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혼날까봐, 벌 설까봐 겁나서 순간 둘러댄다. 소미도 그런 문제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서 레드카드를 내놓은 상태다. 두 번 부드럽게 용서했고 세 번째 또 그러면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만든 거짓말이 아닌, 그냥 만든 거짓말에는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아이들이 현실과 상상을 혼동해서 그런 말을 하는 시기도 있다지만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이 그 시기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이틀 후 S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차 한 잔을 청했다. 평소 아이들답지 않게 엄마들 사이의 교류는 많지 않았던지라 내가 어찌 말을 꺼내나 고민하고 있는데, S의 엄마가 이틀 전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처음에 S는 완곡하게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였다고 또 다시 둘러댔는데, 곧 그럼 소미이모한테 가서 물어보자, 하는 말에 이실직고를 했다 한다. 나한테 뭐라 하더냐고 묻길래 들은 대로 대답했더니 제대로 다 털어놓긴 했단다.
그러면서 그 엄마의 고민이 봇물을 이루었다. 최근 소미와 통화할 때 조금씩 말을 보탠다 싶어서 주의를 몇 차례 주었고, 그래서 그런 기미를 미리 보긴 했다고 했다. 아이는 솔직하게 다 말한 후 “엄마, 나 거짓말이 조금씩 재미있어져요”하더란다. 늘 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해라 하는 말을 가르쳐왔는데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S의 엄마는 딸이 자기가 가진 것은 다 보잘것없다고 느끼고 남이 가진 것은 다 부러워한다는 데서 상심이 컸다. 특히 소미와 비교하고 소미가 없으면 놀지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소미와 놀지 못하는 건 엄마 때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난 용기를 내어 그래도 S는 우리 집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여느 아이들보다 조금 더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많이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했더니, 의외로 S의 엄마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이 있긴 했다고 말했다. 나는 S의 다른 두 면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난감했다. S는 천성적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욕구가 높은 아이이거나, 얼핏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아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만 막연히 들었다.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그 반대로 자랑하는 말도 많이 하는 거고, 적당히 칭찬 받을 말을 보태서 들통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도 꾸며서 하는 것 아닐까.
이런저런 얘기를 두어 시간 가량 하고 아이들 돌아오기 전에 일찌감치 일어서면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소미와 S 정도의 친구 사이라면 저는 아이들을 ‘같이 기른다’고 생각해요. 제가 혹시 이야기 중에 마음 상하게 하는 말씀을 드린 게 있다 해도 절대 S를 나쁘게 보아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 알아주세요. 저는 평소 소미 소은이와는 또 다른 성품을 가진 참한 S를 참 예뻐했고 칭찬을 많이 했어요. 다만 우리 소미나 소은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상의 드리러 온 거고, 소미소은이가 S네 집에서 놀면서 영 아니다 싶은 행동을 하거나 하면 바로잡아 주시고 안 되면 제게도 귀뜸해 주십사 하고 부탁드리러 온 거예요.”
나는 진심이었다. S의 엄마는 고맙다고 했다. 정말 자기 아이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내 진심이 전달되었구나 싶었다. 소미 소은이와 친하게 지내게 된 이후, 내성적이고 너무 소극적이던 아이가 많이 적극적인 성격이 되었고 활발하고 또렷해졌다며 웃었다. 나는 걱정을 안고 간 내가 오히려 부끄럽고 고마웠다. 내 아이가 문제가 있어도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엄마도 많은데… 더 이상 S에 대한 염려는 저만치 던져버려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끝끝내 삼킨 말이 한 가지 있다.
‘S의 방과 후 공부를 다섯 가지에서 세 가지 정도로만 줄여주시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