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시대
봄이다. 그런데 생기 있는 계절이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나는 요즘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있으니, 따사로운 햇살이나 보드라운 훈풍의 손짓을 창 밖으로 빤히 보고 느낄 소은이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가볍게 옷 입고 슬슬 산책하기도 좋은 동네에 살면서도 눈뜨면 밥, 빨래만 겨우 하면서 꼬질한 것만 면하고 사는 형편이다. 무슨 병이 난 것처럼 손 하나 까닥하기 싫으니 자주 침대에 누워 일명 '시체놀이'에 빠져 비몽사몽이다.
아이들에겐 아예 부탁을 해두었다. 엄마가 요즘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고 자주 눕고 싶으니 그럴 때는 한 30분에서 1시간만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지 말고 좀 쉬게 해달라고. 어른 같지 않아서 남의 사정을 헤아린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희들 딴에는 신경을 쓰는 듯 보인다. 적어도 소미는 그렇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일어나면 "엄마, 좀더 누우시세요('누우세요'가 여간 잘 안 되는지 자주 이렇게 말한다). 피곤하신 것 같애요" 한다.
그러나 소은이 혼자 있는 오전엔 사정이 다르다. 둘이 있으면 소미가 소은이를 데리고 놀면서 귀찮은 일이 적어지지만, 소은이 혼자서는 아주 심심해한다. '그건 엄마 사정이니 내 알 바 아니다'하듯 그냥 이것저것 요구가 많고 내내 내게 치대고만 있기 일쑤다. 주로 먹는 것으로 심심함과 무료함과 따분함과 지루함을 달래는데 요즘 정말 먹기도 많이 먹는다.
어제는 점심밥을 먹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쨈 바른 빵과 우유를 먹고, 얼린 리쪼(짜먹는 요구르트)를 두 개 먹었다. 그리고 아주 쬐끔 놀다가 방울토마토를 먹고 간식용 소시지 두 개를 먹었다. 그리고 끝으로 자일리톨 껌까지. 밤엔 부활절이라고 성당에서 받아온 삶은 달걀(이걸 너무 좋아한다) 한 개 반을 포도 주스와 먹고 잠들었다. "소은아, 네 아빠 돈 많이 벌어야겠다. 이렇게 잘 먹으니…." 이게 요즘 소은이가 심심찮게 듣는 소린데, 그도 그럴 만한 게 조금 앉아 있으려고 하면 끊임없이 먹을 것을 생각해내고 달라고 한다. 며칠 전엔 냉장고에 딱히 먹을 게 없으니 랩에 싸둔 오이 한 개를 꺼내 들고 "엄마, 오이 씻어서 반만 딱 잘라 주세요. 히니 먹을 거예요" 이럴 정도다.
그건 그렇고 요즘 소은이는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이상한 말버릇이 생겨 무력감에 빠진 나를 그나마 활기 있게 웃겨준다. 아니 웃기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개그맨이 유행어 퍼뜨리는 것처럼 우리 식구에게 퍼뜨려 너나 할 것 없이 그 말을 즐겨 쓰는 데까지 이르렀다.
소은이는 내게 야단 맞거나, 소미와 놀다가 말발이 달리거나 열세에 몰린다 싶으면 가만 있다가 갑자기 "발꼬락 맡으기" 이러면서 발을 번쩍 들어 우리 앞으로 내미는 것이다. '발가락'도 아니고 '발꼬락'에 '맡기'도 아니고 '맡으기(발음은 '마트기'가 된다)'가 합성되어 아주 웃긴 발음이 되는데, 남편을 닮았는지 어떤 냄새든 냄새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다보니 그런 말을 만들어낸 건지는 모르겠다.
이젠 심심하거나 할 말 없을 때, 또는 놀다가 나랑 눈이 마주쳐서 멋쩍을 때 등 시도 때도 없이 "발꼬락 맡으기"다. 최근엔 업그레이드되어 "궁뎅이 맡으기"까지 추가되었는데 꼭 뒤돌아서 엉덩이를 우리 쪽으로 비쭉 내밀기까지 하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둘 다 좀 깨끗치는 않다.
이런 개그맨 수준의 까불기는 엊그제 부활절 미사를 드리는 성당에서 또 여지없이 드러났다. 제 언니랑 눈에 띄게 한복만 곱게 입으면 뭐하나. 하도 까불고 입을 나불거려 도무지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우리 가족은 결국 유아실로 자리를 옮겼다. 좀 어려서 길고 엄숙한 미사를 참기 힘들어해도 그 분위기를 어릴 때부터 익히게 하자는 남편의 뜻대로 그냥 다른 어른들 틈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곤 했는데 그날은 도저히 안 되었다.
유아실에선 더 떠들고 까불고 뛰고 난리였다.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듣질 않았다. 비록 통유리로 신부님 눈엔 훤히 보일지라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터라 그나마 좀 나았다. 그런데 다섯 살 은경이가 의자 맨 뒤로 걸어와 유리 저편에서 소은이의 행동거지를 빤히 보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걸 안 소은이가 그냥 놔두질 않았다. 대번에 예의 그 제스추어가 나왔다.
참, 한복 입고 다리 번쩍 쳐들고 하얀 속바지 보이도록 엉덩이 내밀고…. 꼭 무슨 홍콩 무술영화에서 팔을 쭉 뻗으며 "장풍 받아랏!"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소은이의 돌발행동에 남편과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킥킥대고 말았다. 이런 식이다. 웬만큼 야단을 해도 노여움도 안 타고 눈빛을 땡글땡글 뺀질뺀질하며 오만 가지 웃긴 소리와 표정으로 야단치는 사람 맥빠지게 한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밤엔 아주 다른 사건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날 낮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까지 깨어있던 소은이는 7남매 하나하나를 입양해서 기르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애를 잘 보여주는 <선물>이라는 드라마를 나와 함께 보고 있었다. 그날은 한복 빌릴 돈이 필요한 누나를 위해 형제들이 아빠가 아프신 틈을 타 우동가게 문을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숨죽이고 보던 소은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게
아닌가.
정말 요즘 소은이의 이런 행동거지와 말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내가 글로 세세히 다 표현하기 버거울 정도로 넘쳐난다. 만물에 생기를 부여하는 봄기운이 나에게서는 비껴가고 소은이에게만 몰아서 간 것인지 펄펄 에너지가 넘치고 감성이 폴폴 살아 움직인다. 소은아, 그 생기 좀 엄마에게도 나누어주렴. 아, 지금 한참 나누어주고 있는 거라고?
<절묘한 타이밍>
<궁뎅이>
<전화>
<책>
<사운드 오브 뮤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