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도망자

M.미카엘라 2000. 10. 2. 00:49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집' 올 로케이션, '양재형' 주연의
블랙코미디 정도인데, 영화로 만들 만한 가치는 아예 없다.

요즘 나는 가을 햇빛을 외면하고 싶다. 그냥 동굴 같이 햇볕이 안 드는 그런 방에서
더 이상 잠자는 일이 불가능할 때까지 허리가 아프도록 자고만 싶다. 밥도 꿈속에서
진수성찬으로 차려 먹으며 그냥그냥 자고 싶다. 햇빛이 황금빛 고운 비단실
뭉치처럼 차르르하게 베란다에 떨어지며 온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 소미와 소은이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들러붙어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더 잦았다. 아니, 사실은 내 컨디션이 안 좋으니까 아이들이 보통 때와
다름없이 내게 요구하고 기대하고 사고치는 일들인데도 잘 참아지지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싶다.

컵에 따라준 우유를 한 발자국 내딛으며 홀랑 쏟고, 누가 오랜만에 왔는데도 끊임
없이 책 읽어 달라하고, 소은이 업고 있는데 자기도 같이 업으라고 하고, 응가 마렵다고
해서 변기에 앉혀주면 "똥이 안 나와요 엄마" 이러길 세 번째, 소은이는
먹여주는 밥은 매번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자기 혼자 온데만데 다 흘리며
먹고, 밥풀을 짓이기며 돌아다니느라 식사시간은 언제 끝날 줄 모르고, 소미는
손을 혼자 씻고 나온 것까진 좋았는데 옷을 앞섶이며 바지까지 흠뻑 적셔서
나왔다.

둘이 징징대면서 내 몸에 들러붙어서 몸으로 놀아주길 바랄 때쯤이나, 누런 코가
입으로 들어가기 직전 꼬지지한 얼굴로 밖에서 오줌을 치르르 싼 채 신발까지 다
적셔오면 완전 사면초가다. 소리 높여 야단야단을 하고 '아이고 내 신세야' 하는
투로 거친 속내를 드러내다가 소미 밉상으로 우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결국
도망을 치고 만다.

어디로?
안방이다.

밖으로 가버리면 아이들이 너무 놀랄 것 같고 계속 얼굴을 마주대고 있으면 더 큰
상처될 말이 줄줄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까지 똑 잠그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목청 큰 두 애들이 악악 울어대는데도 모른 척 다시 큰 대자로
돌아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눈을 한참 감다가 하며 감정을 골랐다.

문밖에서 "엄마, 소미가 잘못했어요"하며 울었다. 사실 애가 뭘 그렇게 크게 잘못
했다고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픈데도 일어나기가 싫었다. 소은이는 "엄마, 엄마"
하면서 문을 두드리며 울었다. 그렇게 있기를 한 10분이 될까말까 하지만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일주일 동안 세 번을 이렇게 안방으로 도망쳤다.

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방으로 휭 들어가 버리는 내 모습을 언니가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바로 위 언니는 내게 육아조언을 많이
해주는 주변 사람 중 하나다. 아들에게 여간해서 소리 지르지 않고 이성적으로
기른다는 소리를 잘 듣는데, 우리 집에 오거나 나를 만나면 내가 소미, 소은이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고칠 점을 자주 지적해준다.

그런데 그 조언이 언제부턴가 내게 무척 스트레스가 되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옳은 말이고 언니는 어렵지 않게 실천하고 있으며, 그 말을 쓰게 받아서
잘 고치면 우리 애들에게 좋은 줄 알지만 어려울 때가 많았다. 언니보다 느긋하지
못한 내 성격이 문제고 언니는 애가 하나, 나는 고만고만한 애가 둘이라는
점이 조금은 더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니를 의식할 때 딸들에게 하는 행동이 더 부드럽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나의
그 눈치봄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확 짜증이 밀려왔다.
"언니, 나한테는 신랄하게 그래도 되는데 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땐 조심해. 애가 둘인 사람에겐 조심스럽게 말하고 애가 셋인 사람 앞에선
입을 다물어. 언닌 아들 하나뿐이니까 둘 이상 기르는 사람들 하루를 다
알지 못해. 나도 소미 하나일 땐 안 그랬는데……"

그럼 애를 열 명 정도 기르는 사람은 모두 자기 성질 다 버리고 제 자식 잡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애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엄마의 에너지 소비는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아니, 모르겠다. 무슨 말이든 나를 합리화시키는 꼴밖에 안 되는 것 같아 개운치
않다. 무슨 말로든지 설명을 해보고 싶지만 오늘은 잘 안 된다. 그냥 거친 말로
목청껏 소리치지나 말고 그런 말들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면 입을 틀어막고 영화나
찍어야겠다. 방으로 방으로.

침대 옆,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맑다. 올 가을은 이 아줌마가 보기에도
유난히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