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딸의 힘

M.미카엘라 2002. 10. 28. 17:00

1.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동시에 입장해야 한다.
2.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3. 제사는 딸도 지낼 수 있다.
4. 가사노동은 남자도 해야 한다.
5. 여자 상사 밑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6. 폐백은 신랑, 신부 양가에 모두 인사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7. 한 자녀만 교육시켜야 한다면 꼭 아들이기보다 능력 있는 자녀를 시킨다.
8. 재산은 부부 공동명의로 해야 한다.
9. 여성의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10.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

이것은 남녀평등 지수를 묻는 질문이다. '예'나 '아니오'로 답할 수 있으며 예가 많을수록 평등주의자에 가깝다. 결과보기는 '예'가 1∼2개면 '아직 멀었어요' 3∼4개면 '좀더 실천하세요' 5∼7개면 '평등 실천주의자' 8∼10개면 '철저한 평등주의자'라고 한다.

이것은 요즘 내가 일 때문에 한창 많이 보는 어떤 종류의 책 가운데 있는 질문지다. 고작 요 10개의 항목을 가지고 평등주의자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것은 좀 지나친 데가 있지만 그냥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은 문제라면 한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난 10개 질문 모두 '예'라고 답했으니 철저한 평등주의자인가?

난 내가 이 항목에 답한 이후 곧장 옆에 앉은 남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남편은 7개 항목에 '예'라고 대답했다. 이 결과보기 대로라면 남편은 '평등 실천주의자'다. 나는 "우와! 대단한 걸. 이렇게 평등지수가 높았단 말야? 우와!"하면서 가볍게 놀렸다. 남편은 사실 자기가 전 같으면 '아니오'하고 대답할 부분이 꽤 있었는데, 딸을 둘 기르다보니까 남녀평등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여성을 차별하는 시각은 딸들을 차별하는 시각이라는 것이 분명 남편에게도 작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딸들에게 남성으로서 아빠가 어떤 도움을 주어야 좋을까, 같은 여자인 엄마가 길러주지 못하는 또 다른 색깔의 감성이나 선 굵은 조언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 했다. 딸이 이 세상에서 당당한 사회인으로 크게 성장하는 배경에 아버지들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내가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어서 그 덕을 보나 싶지만, 워낙 딸들한테 끔찍한 아빠니 이런 고민쯤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나와 연애할 때 꽤나 답답하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시선으로 내 생활습관 하나하나를 간섭했었다. 내 생활습관이나 자세 중 자주 지적하면서 고치길 원했던 부분이 '여성스러운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무릎을 꼭 모으고 앉길 바랬고, 다소곳하게 얌전하게 행동하길 바랬다. 너무 선머슴 같은 숏 커트를 싫어했고 남자들처럼 자기 어깨에 손 척 걸치는 걸 무척 싫어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두 다리를 꼭 모으고 찍으라고 했다.

그의 모토는 늘 '여성스러움'이었고 '여자다움'이었다. 그래서 늘 그런 문제로 부딪치고 싸우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얌전하지도 다소곳하지도 차분하지도 조용하지도 참하지도 않은 편에 속한 나와 결혼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그걸 어찌어찌 견디고 결혼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서로 바라는 게 달랐는데도 결혼할 수 있었던 게 이상하다.

그리고 남편은 결혼 후부터 서서히 달라졌던 것 같다. 소미를 낳고 소은이를 낳고 집안에 여자가 셋이 되면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자기 스스로 털어 내게 되었다. 여전히 집안 일은 거의 나를 도와주지 않고 있지만 딸들에게 여자답게 행동하라거나, 여자답지 못한 태도라거나 하는 말은 한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내게도 결코 결혼 전처럼 이것저것 여성스러움에 대해 간섭하고 강요하는 일은 없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단련된 부분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분명 딸들이 가져온 힘이 크다 생각한다.

남편 스스로도 자기는 이제 그런 말 안 하기로 했다고 했다. 여자이기 전에 바른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아직도 '지극히 여성스럽고 다소곳한 여자'를 예쁘게 보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딸들에게는 그런 말이 함정이나 올가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자기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데도 자칫 '난 여자니까' 하면서 쉽게 포기를 하거나, '이건 여자답지 못해'하면서 스스로 낮추거나 소극적이 되기 쉽다는 걸 안 모양이다.

남편은 아직 남자들의 아성이 단단한 군인이라는 직업세계를 알려주는 일을 즐기고, 틈틈이 여성장군이나 여사관생도, 여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좋아한다. 참, 그런데 이 평등지수에 대한 질문을 마치고 오랫동안 나눈 이야기 중에는 여군 이야기가 있다. 주변에 여군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사실 그녀들이 일하는 걸 보면 답답하고 성에 차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아직 여군들은 일하는 게 좀…'하면서 말끝을 흐리는데 내가 단박 발끈하면서 말에 힘을 주었다.

그건 그 여군 개인의 능력을 두고 말해야 하는 거다, '여군이기 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할 게 아니라 '그녀가 자기 업무를 완전히 익히지 못했는지 좀 서툴러서 답답하다'라고 말해야 옳다고 했다. 딸들을 보면서 여성전반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달리 가지게 된다면, 여군의 업무능력에 대한 평가도 그렇게 다른 표현으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남자들도 답답하고 짜증나게 일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뭐."

난 남편이 이렇게 달라진데 대해 내심 흐뭇하다. 아들만 둘 두었다면 영원히 '여자의 여성스러움'에 대한 환상에서 조금도 못 벗어났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인 '다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정신적 메카니즘의 '다름'을 무시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여자라는 성(性) 하나 때문에 그 모든 삶과 일에 대한 열정과 능력이 과소평가 되거나 미리 불확실한 쪽으로 규정되는 일이 생기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공지영의 표현을 빌어 그건 여자이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왜 친구 H의 시어머니가 했다던 말이 생각나는 것일까. 조금 전까지 H와 통화했기 때문일까. H의 시어머니는 가끔씩 당신 동생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들한테 맞아죽어도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라고 하신다나? 으∼! 클났다. H는 아직 맞아죽어도 좋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형편이다. 아주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고 영리하고 야무진 딸만 하나 있다.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