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화려한(?) 전입신고

M.미카엘라 2003. 2. 4. 09:59
벌써 이사한 지 2주가 넘었다. 15평에서 19평, 다시 이제 여기 13평 아파트로 이사오니 넓은 아파트 때보다 얼른 쫀쫀하게 수납하고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더했다. 딱 3일 동안 집중적으로 집안 정리, 청소, 수리, 보수를 마쳤다. 지난번 철원으로 이사 때는 그래도 그 이전보다 넓은 집이라 이리저리 늘어놓고 살기도 살았는데…… 좁아서 어찌 지내나 해도 또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내 집 같고 이젠 별로 나쁘지 않다.

지난 2주 동안은 많은 분량의 일(job이라고 해야 하나? '알바'라고 해야 하나?)을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해야 했으니 정말 어떤 물리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지금 2주도 넘은 일을 쓰려고 하니 꽤 민망한 기분이지만 이 일을 그냥 기록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용기를 낸다.

지난 1월 15일. 우리 네 식구는 철원의 매서운 공기를 뒤로 하고 이사를 했다. 아무리 포장이사업체를 통해 이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무려 다섯 평이 줄어든 집에다가 이 사람들이 살림살이를 말끔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래도 밥을 해먹을 수 있게 해주고 이부자리 펼 자리 만들어주고 하니 일반이사에 견주면 그래도 심란함이 훨씬 덜하다. 아이스박스, 선풍기, 야외용 버너, 남편의 책 상자 등등 자주 쓰지 않는 계절용품이나 잡동사니는 좁으나마 뒤 베란다에 3단 앵글을 하나 맞춤제작해서 정리하리라 마음먹고 그냥 앞 베란다에 쌓아두고 가시라고 했다. 어차피 당장 정리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남편은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나갔으니 그야말로 온전히 이사 정리가 내 차지였다. 아이들은 발바닥이 새카만 채 놀고, 나는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좀체 갈피를 잘 못 잡으면서도 저녁도 어설프게 먹은 채 정리한다고 수선을 떨었다.

그러다가 문밖에 놓여있던 덜 찬 쓰레기 봉투를 들여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내가 익숙지 않아서인지 낡은 아파트의 현관문이 제대로 물려 닫히지가 않는 거였다. 문이 완전히 꼭 닫혀야 안에서 잠글 수 있는데 이게 안 되는 것이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아무리 잡아당겨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밖에서 밀어본다고 민 게 화근이었다. 조금 세게 쾅 밀면서 닫았더니 제깍 닫히는 거다. 그런데 "이제 됐네!"하는 내 말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왠지 이게 이제 아주 열리지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그 감대로 손마디가 다 아파지도록 노력을 했지만 도무지 덜컹거리기는커녕 꿈쩍도 안 했다. 시간은 저녁 8시쯤. 나는 이사온 첫날이라 좀 당황했다.

소미와 소은이는 내가 그런 노력을 들인 지 한 10분만에 놀던 방에서 나와서 나를 찾는 기척을 했다. 나는 아이들이 놀라서 울고 난리를 피울까봐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걱정 말라고 달랬다. 아이들보고 문을 잠가보라고 했더니 밖에서도 잠금장치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열어보라고 했더니 다시 원래대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분명 문이 잠긴 건 아니었다. 나는 녹슨 보조 열쇠를 의심했다. 그게 쾅 닫히는 순간 꽉 물려버린 게 아닌가 하고.

난 20분 정도를 더 노력하다가 아이들에게 관리실에 가서 아저씨를 모셔오겠노라고 했다. 걱정 말고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생각보다 소미가 참 의연했다. 계속 "엄마 춥겠다. 어떻게 해요? 엄마 추워서"라는 말만 했다. 난 당시 얇은 스웨터에 면바지를 입었다.

그러나 관리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50대 관리인 아저씨도 어쩌지 못했다. 큰 공구가 들어있는 창고 열쇠는 다른 관리인이 가져갔다고 하셨다. 가위와 드라이버를 가지고 문틈으로 벌려 열어보려고 했지만 가위 끝이 부러지기만 했다. 나와 아저씨는 정말 젖 먹던 힘을 다해 한 40여분간 사투를 했다. 손가락 마디가 붓고 소용이 없었다. 남편을 부를까도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그를 이런 일로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앞집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정식 인사도 못했는데 그 집 바깥 분이 연장통을 들고 오셔서 애를 쓰셨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세 사람은 문이 잠긴 게 아니라는 사실에는 모두 의견이 같았지만 이걸 어떻게 할까에는 묘안이 없었다. 여긴 성남시지만 주변은 완전히 시골이다. 군부대에 밭, 야산 등등. 문이 잠긴 거라면 멀리 있는 열쇠 집에라도 연락하면 되겠지만 그도 아닌 게 확실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소미는 내 핸드폰으로 전화한 제 아빠와 통화하고 내 말을 전했다.
"아빠. 엄마가 오시지 않아도 된대요. 아저씨들이 금방 열어주신대요."
소미는 그 시간이 지나도록 똘똘하고 의연하게 나보고 걱정 말라고 되레 위로했다. 소은이는 좀 울먹였다. 하룻밤도 안 잔 낯선 집인데 이런 사고가 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도 보고 싶다고도 하고 "엄마, 무슨 잠바 입었어요? 엄마 추워서 어떡해? 이이잉!"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크게 우는 일이 없어서 그나마 정신이 있는 편이었다.

한동안 둘이 티격태격 하는 소리가 나고 소은이가 "아야, 아야 아프단 말야. 언니 때문이야잉!"하면서 우는 소리가 잠깐 났다. 그러다가 춥다고 울었다.
"엄마 소은이 춥대요."
"응, 그럼 엄마 침대 가서 둘이 이불 덮고 누워있어. 응? 울지 말고. 엄마는 여기 문 앞에서 어디 안 가니까 걱정 마. 너희들이 문 앞에서 크게 울면 아저씨들 마음이 더 급해지셔서 문을 빨리 열 수가 없거든."
"네, 엄마. 소은아! 언니랑 방에 가자."
그리고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나는 결단을 했다. 사람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닌 이런 경우 불러서는 안 되는 것 같았지만, 할 수 없이 아이들 때문에라도 119를 부르기로 했다. 나도 너무 추운데서 떨면서 지쳤다. 앞집 전화기를 빌려서 119에 구조요청(?)을 했다. 아, 하필이면 왜 이사를 온 오늘이란 말인가. 동네가 다 떠들썩하게 생기게 되었지 뭔가. 앞집 초등학생 자녀로 보이는 두 남매는 아이들답게 119까지 오게 되는 일을 구경하게 되자 재미있는 눈치였다.

15분 후쯤 분당 쪽 소방서에서 왔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정말 불을 번쩍번쩍 달고 무슨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했다. 먼저 올라온 아저씨는 상황을 묻고 아이들이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냐고 확인했다. 그리고 단순히 문이 닫혀서 안 열리는 상황인 것을 알고는 내게 조금 핀잔하듯 말했다.
"원래 이럴 때는 119 부르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곧 구조대가 옵니다."
조금 감은 잡았었지만 2시간 넘게 엄한 사람들까지 생고생시킨 내 절박한 사정에 견주어 사실이 그렇다고는 해도 좀 야박하게 들려서 잠시 서러워졌다. 곧 남편도 돌아왔다.

그리고 일은 너무 간단하게 끝났다. 우리 집은 4층이라 다른 집을 이용해서 가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구조대는 층계참에 있는 계단 난간에 로프를 매고 외벽을 탔다. 앞 베란다 창을 통해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구조대원은 그 철옹성 문 같던 현관문을 쓰윽 열고 나왔다. 그 순간 기뻐야 할 텐데 짧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온몸에 기운이 쪼옥 빠지는 게.

원인은 보조 장치가 잠긴 것이었다. 쾅 닫히면서 고리가 척 내려온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손잡이에 넣는 열쇠만 받았지 보조 열쇠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구조대원들은 아이들 탓을 했다. 아이들이 잠근 것 같다고. 난 절대 아이들 소행이 아님을 안다. 왜냐면 내가 문을 열어보려고 처음 시도했던 그 10분 동안 아이들은 방에서 내가 그 씨름을 하는 줄도 모르고 놀고 있었으니까. 아이들이 방밖으로 나와서 잠금장치에 손을 대기 전부터 열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설명할 기력도 없었고, 다들 내 말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들어왔는데 이상했다. 문이 열렸다고 좋아해야 할 아이들이 조용했다. 방에 가보니… 참 내! 웃음이 나온다. 소미는 대자로 뻗어서 잠들었고, 소은이는 머리를 산발한 채 얼룩진 얼굴로 이불 속에서 눈만 말똥말똥거리며 나를 보았다.
"소은아, 엄마 왔잖아. 안 좋아? 왜 이렇고 있어?"
"엄마, 보고 싶었어요. 근데 졸려워요"
"그래, 걱정 많이 했지? 잘 참아서 이쁘다. 이제 걱정 말고 자도 돼."

이러면서 소은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방바닥이고 이불이고 베개고 잘린 머리카락이 한 줌은 족히 되어 흩어져 있는 게 아닌가. 소은이 머리카락이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은이 머리에는 사탕도 아닌 정체불명의 물질이 달라붙어 끈적끈적거리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소은이는 졸리고 복잡해서 설명을 잘 하지 못했다.
"언니 때문이예요. 언니가 아프게 하고 내 머리를 잘랐어요. 엄마아∼아앙!"

나중에 듣고 보니 위에 두 아이가 잠시 티격태격 싸웠다는 소리가 들렸다고 옮긴 장면에 해답이 있었다. 소은이가 새로 이사온 이 집 문에서 떼어낸 바람막이 문풍지(스폰지에 끈끈이 발라져 있는)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긴 테이프 같은 모양이었으니 머리에도 쓰고 돌돌 감고 아주 난리를 친 모양이다.

그런데 그 끈끈이가 머리카락에 샅샅이 달라붙었으니 소은이가 당황했다. 소미는 돕는다고 도왔는데 문풍지를 잡아당기니 머리카락까지 당겨져 소은이는 무진장 아파서 울었던 거다. 그리고 소은이가 언니 탓이라며 아프다고 울자 빨리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한 소미가 최종적으로 이마 위 부분 앞머리에 붙어있는 문풍지를 떼 내려고 머리카락을 가위로 쑹텅쑹텅 자른 것이다.

그 보지 못한 상황을 연상하면 웃음이 나왔지만 원칙도 없이(?) 잘린 앞머리를 보는 일은 참 심란했다. 더구나 문풍지의 끈끈이가 고스란히 머리에서 떡이 되어 남아 난 정말 울고 싶었다. 난 그냥 잘린 머리카락만 치우고 잤다. 추운 데서 오래 떨다가 집에 들어오니 몸이 노곤했고 이 상황을 해결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사건 당사자가 춥다, 졸리다 하면서 이불 속에서 꼼짝 안 하니 어쩌겠는가. 잤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확 자버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하면서.

다음날 소은이는 침대 끝으로 머리를 대고 누워 1차로 노란 통에 든 라이터 기름으로 머리를 감았다. 쉽게 말하면 휘발유다. 휘발유를 쫄쫄 뿌려가며 그 끈끈이를 녹였다. 이게 사탕 성분이 아니니 물로는 어림도 없었다. 브러시로 머리를 빗어 내리니 세상에 또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빠져 나왔다. 나는 가슴 한켠이 찢어지는데 '휘발유로 머리 감는 여자'와 그녀의 언니는 그래도 좋다고 낄낄낄 시시덕거렸다.

다시 2차로 물과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빗질을 하니 몰골은 나아졌지만 짧게 잘린 앞머리가 막 벌초를 마친 산소의 잔디처럼 삐쭉 올라와 볼썽사나웠다. 이휴! 그래도 어제 엄마의 실수로 문이 잠겨 맘 고생을 한 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엄마가 추울까봐 걱정해주고 울지 않고 잘 참아준 딸들이 아닌가. 정말 휘발유로 머릴 감을 만큼 용감하다. 저희들 딴에도 안에서 얼마나 다급했으면 저랬을까. 상상하면 사실이지 배꼽 빠진다.

끝으로 소미는 자기는 보조 잠금 장치에 손도 안 댔다고 해명했다. 그렇게 잠그는 건지도 몰랐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아니라도 소미의 표정은 딱 '엄마, 엄마가 믿어주시지 않으면 전 너무 억울할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믿는다고 했다. 정말 저절로 잠금 장치가 내려앉았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손대기 전부터 안 열렸으니까.

우리의 전입신고는 참말로 화려했다. 그리고 며칠 후 휘발유로 머리 감은 깜찍한(끔찍한 건가?) 그녀는 다시 베란다 유리창을 박살내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행이 유리 전체에 시트지가 붙어있어서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집안의 문이란 문에 열쇠가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고 모두 새로 사서 도어록을 교체했다.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들어가는 1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