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결혼기념일에 돌아본 결혼 이야기

M.미카엘라 2000. 11. 23. 11:38
오늘은 조금 육아일기에서 비껴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두 딸이 태어나기
이전 이야기, 그러나 두 딸이 생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앞서 자리해야 할 이야기다.

요 며칠 나는 너무 깊이 속이 상해있다. 결혼하면서부터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일이 늘 수면 아래 가라앉은 것 같아 평화롭다가도, 가끔씩 물 밖으로 떠오르는데
며칠 전 또 한 차례 그랬다.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안개를 뒤집어쓴 듯
풀어놓지 못할 이 밑도 끝도 없는 사건의 후유증을 짊어지고 살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가족은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속에서 그 편안한 관계를 이용해, 더욱 더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시를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내 주변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라도, 혹은 늘 아이들 이야기에 귀가 시끄러웠을지도
모를 분들을 위해 좀 색다르게 내 결혼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한다.

지난 일요일 우리 부부는 결혼 6주년 기념일을 맞았다. 뭐 하나 특별하게 보낸 것이
없기 때문에 결혼기념일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냥 중매 결혼해서 살아가며 정을 쌓고 있는 경우만 제외하면 다들 연애에 대해선
책 한 권쯤 쓸 만한 사연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남편과 나는 스물 네 살, 의정부에 있는 한 성당에서 만났다. 모태신앙을 가진 그에
견주어 나는 영세를 받은 지 한 달도 채 안 된 새내기 신자였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만나면서 이 자리가 처음이 아님을 알았다.

남편은 군인이셨던 아버님 근무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자주 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 것인데 실제 학교에서 만난 기억은
둘 중 누구에게도 없다. 서로 따로 교류하는 중학 친구들을 통해서 너희 성당을 다니는
아무개 이야기를 서로 듣기만 하다가 이윽고 만나게 된 것.

처음부터 연인 사이는 아니었고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남편의 눈빛이
먼저 달라졌다는 점에 대해선 남편도 인정한다. 친구 사이일 때 오히려 우리는 화기
애애하고 즐거운 시간이 많았지만 서로 교제를 하는 차원으로 넘어가고 연인으로
발전을 했다 싶을 무렵부턴, 그야말로 '연인'이란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살벌한 싸움을
거의 날마다 했다.

이쯤에서 좀 무리이긴 하지만 그 당시 남편의 태도를 몇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고지식, 적지 않은 의처증 기질, 보수적, 자기에게 나를 끼워 맞추려는 노력들이다.
나를 좋아하면서도 자기 양식에 거슬리는 행동을 못 그대로 못 봐주고 일일이 지적하고
고치길 바랬다.

그러나 나 역시 만만찮은 상대. 성격 급한 것이 최대의 흠이지만 성장기를 돌아볼 때
비교적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나를 이만큼 키워주신 걸 부모님께 감사하며 나름대로
걱정 끼치지 않고 칭찬도 제법 들으며 커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스물
네 해나 지각한 몸으로 나타나 나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싶은 게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틈만 나면 으르릉대고 낮이고 밤이고 싸워댔다. 분식집에서 쫄면 두 그릇 앞에 두고
한 젓가락도 안 먹고 싸우다가 나온 적도 있고, 대학가가 몰려있는 신촌 번화가에서
격렬하게 싸운 적도 있다. 코펠이며 버너며 챙겨들고 간 여행지에서도 감자며, 양파,
소시지, 카레봉지를 공중으로 던지며 싸웠던 기억은 두고두고 웃음이 난다.

그렇게 잘 싸운 우리들이 결혼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후에 그 당시 청년회를
지도하셨던 보좌신부님의 말씀을 들었다. 싸우다 정든다는 말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대단하게 싸울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까지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도권 쟁탈전을 그렇게 앞서서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남편은 그때 내가 어지간히 자기 속을 태웠다고 한다. 자기 손안에 이제 완전히
정착한 것 같다 싶다가도 어느새 날개도 없는 내가 저리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는
것이다. "끼끼, 그것이 연애의 묘미지. 그 재미도 없으면 무슨 재미?"하고 나는 여유롭게
그때를 회상한다.

그렇게 우리는 스물 일곱에 성당에서 결혼했다. 토요일이었던 그날, 준비가 너무
일찍 끝난 나는 배고픔을 견디다못해 언니가 만들어준 드레스를 입고 언니가 만들어준
부케를 들고 한껏 공든 화장을 한 얼굴로 미리 피로연장에서 한 상을 받아서 먹었다.
남편도 나도 너무 맛있게 즐겁게 식사를 했다. 저런 신랑신부 처음 본다는 얼굴이
많았지만 뭐 큰 흉도 아니고 그러면 어떤가 싶었다.

그리고 성당에서 신부는 한켠에서 다소곳이 오시는 손님을 받지 않고(?) 뜰에 나와서
신랑과 함께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나는 이 일을 두고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잘했다고 생각한다. 비디오를 봐도 훨씬 좋다.

결혼식 피로연은 그야말로 중학교 동창회 분위기였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들이 모두
와서 우리가 신혼여행을 가던 말던 신경도 안 쓰고 저희들끼리 놀 궁리에 바쁜 듯
보였다. 나중에 들었는데 일요일인 다음날 새벽까지 광란의 밤을 보냈다는 전언으로
미루어 보아, 정말 애들은 뭐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호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곧 군입대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군복이나 벗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으로 과감히 멀리 잡았다.
예단 없애고, 예물은 커플링으로 반지 한 개씩과 십만 원 안팎의 시계, 예복은 한복과
양장 한 벌씩을 했다. 그리고 여행에서도 거의 선물은 안 샀다. 양기름으로 만들었다는
라놀린 크림인가 하는 걸 몇 개 쌌을 뿐.

신기한 건 결혼 이후, 신혼여행부터 이제까지 싸웠다 싶게 싸운 적은 고작 한두 번?
하고 꼽을 정도로 거의 안 싸웠다는 점이다. 그렇게 싸운 보람이 있는 건지 서로
적응을 하여 위험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우린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애시절에 충분히 싸우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남편은 남편감으로서 아주 괜찮다. 철저할 정도로 자기 직업에 성실하고 가족들에게
끔찍하다. 내가 결혼을 결정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아내가 되는 여자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덕목으로 다가오는 그것들이 여간해서 쉽게 변할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활을 해보니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한결같은 사람.

조강지처에게 못하면 평생 후회한다는 아버님 말씀을 깊이 새긴다나. 가정경제의
실권자이면서도 돈에 관해서는 아주 투명한데 모든 걸 내가 관리하도록 한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연애를 하려한다 해도 돈이 없어서 퇴짜맞을 것을 내 안다. 예의
없는 사람을 제일 못 봐주니 어디서 그런 사람 보면 가만있질 못해서 내가 늘 불안하다.

그러나 도대체 부엌엘 안 간다. 요즘 남자들이 어디 그런가. 하다못해 라면이나 커피라도
서비스하는 맛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부대에서 엊그제 한식조리사 시험을 봤다나?
자격증 시험에 대해 욕심이 많은데 조리사 자격증이 있으면 이 담에 진급 못해도
나가서 '가든'이라도 차릴 수 있다는데 안 웃을 수가 없다. 오늘 군복 위에 앞치마 두른
진기한 사진을 가져왔는데 너무 신기하고 신기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산적'하고
'배숙'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결혼에 대한 정의는 어쩌면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을지 모른다. 아직은 그 어떤
말로도 내 결혼생활을 말하기 어렵다. 말할 수도 없다. 어떤 광고에서 한 학생이 한
말로 대신한다. 나를 바라보는 소미, 소은이의 눈을 보며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
라고 할 수밖에.

갑자기 내가 직접 초대의 글을 썼던 우리 청첩장이 생각나서 보관해두었던 걸 꺼내
보았다.

사람들은 혼인을 이제 막 시작일 뿐인 삶의 가시밭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두 사람 사랑과 존경으로 이 거친 길 앞에 기꺼이 섰습니다.
깊게 단풍진 가을, 분주한 마음 가득하시겠지만
꼭 오셔서 힘껏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