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말,말,말!

낮은 눈높이로 본 전쟁 이야기

M.미카엘라 2003. 3. 29. 00:28

소은이가 피곤한지 5시 반부터 잠이 들었다. 내가 보기엔 확실히 내일 아침까지 잘 것 같다. 전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남편마저도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서 나와 소미는 달랑 조용한 집안에서 조금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엄마, 소은이 자고 나랑 엄마랑만 있으니까 좋기도 한데…… 조금 이상해요."
오붓하고 평화로워 좋은 것 같은데, 한 끝이 허전하고 휑한 기분이 드는 것, 한번쯤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나는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고 일찍 잠들게 해주려니 요즘은 9시 뉴스를 종종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 그냥 밥을 먹으면서 8시 뉴스를 보았다. 연일 이라크 전쟁 뉴스에 텔레비전이 떠들썩하다. 개전 일 주일을 맞은 전쟁은 모래폭풍과 이라크의 게릴라식 저항에 강력하게 부딪혀 연합군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엄마, 저번에 엄마가 미국이 먼저 전쟁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미국은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소미의 전쟁에 대한 관심은 꽤 크다. 특히 전쟁으로 다친 아이들이 나올 때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본다. 이 질문으로 시작된 소미의 포화와 같은 질문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음, 그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미국이 좀 욕심을 내기 때문이야."
"무슨 욕심요?"
"석유에 대한 욕심."
"석유가 뭐예요?"
"석유는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이나 집을 따뜻하게 해주는 보일러 같은데 들어가는 기름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거든. 자동차나 보일러말고도 쓰이는 데가 아주 많아서 이게 없으면 어느 나라든 잘 살 수가 없지."
"우리나라는 많아요?"
"아니, 우리나라는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아. 그래서 이런 걸 아껴서야 하는 거야. 세계에서 석유가 나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아. 가장 많이 나는 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많이 나는 나라가 이라크야. 그런데 미국이 이 이라크의 석유에 욕심을 내면서 좀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것 같아."
"왜요? 이라크가 골고루 나눠주지 않아요? 혼자만 쓸려구요?"
"아니, 나누어주긴 주는데(사실 사 쓰는 건데)…… 미국이 그게 만족스럽지 않은 가봐."
"에이, 욕심 많네."

 

휴, 어렵다. 더 파고 들어오면 설명해줄 말이 궁색했다. 그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로 얽힌 국제관계를 어찌 말로 다 설명하리요. 나도 다 모르는 것을.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맥도날드 간판에 올라가 반전시위를 하는 뉴스가 나왔다.
"와! 맥도날드다! 그쵸? 엄마? 사람들이 저기 올라갔네! 와! 재밌다."

그런데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곧이어 미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소미의 질문은 또 이어졌다.

"엄마, 사람들은 왜 저렇게 싸워요?"
"응, 근데 소미야.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지?"
"노무현 대통령이요."
"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이 지금 미국을 도와주자고 해서 저러는 거야. 우리나라 군인아저씨들을 이라크로 보내서 미국을 도와주자고 했기 때문에."
"어! 왜 미국을 도와줘? 미국이 잘못했는데. 노무현대통령 이상하다."
"노무현대통령도 속으론 분명히 군인아저씨들을 보내고 싶지 않을 거야. 전쟁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왜 그러냐면…… 음, 그건 미국이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좀 친했던 나라거든. 지금은 좀 많이 달라졌지만 말야. 우리가 북한하고 옛날에 싸운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때도 우리나라를 도와줬어. 그 이유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소미는 다 몰라도 돼."
"아, 알았다. 그러니까 엄마, 노무현대통령은 우리 군인아저씨들 보고 이라크에 가서 미군아저씨들한테 '그렇게 죽게 싸우면 안 돼, 다음부터 그러지 마시오'하고 말해주러 가라는 거구나. 그쵸? 근데 저 사람들이 노무현대통령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예요? 내 생각엔 그런 거 같은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참, 대통령 대변인 해도 되겠다. 제 나름의 논리가 아이답게 펼쳐지는 걸 보면서 속으로만 웃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가고있는 국제정세나, 북핵문제로 살얼음판 같은 우리나라의 특별한 형편까지 이해시키며 이야기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그래서 불쑥 요즘 한창 눈총을 받는 한미동맹 논리같은 것부터 입밖으로 튀어나왔나?) 거기서 적당히 이야기를 접었다. 사실 소미에겐 이만큼도 너무도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들뿐이다.

"엄마, 근데요. 지금 전쟁을 미국 땅에서 하는 거예요? 아니면 이라크 땅에서 하는 거예요?"
"이라크 땅. 지금 저기 전쟁하는 데서 모래폭풍이 난다고 하는 말 들었지? 이라크랑 그 주변에 있는 나라에는 사막이 많거든."
"그럼 미국 군인들은 어떻게 이라크 땅에 갔어요?"
"배나 비행기 같은 거 타고 가지 않았을까?"
"아, 그래서 이라크 사람이 더 많이 죽고 이라크 나라만 집이랑 빌딩이란 이런 거 다 망가지는 거예요?"
"음, 소미 같은 어린이들도 많이 다치고 그래. 다 이라크 어린이들이야. 근데 미국 사람들도 다치고 죽고 그러니까 전쟁이 나면 다 불쌍해지는 거야. 저 다치거나 죽은 미국 사람들 엄마들은 또 얼마나 슬프겠니?"
"아후, 너무 불쌍하다 증말. 엄마도 내가 죽으면 슬플 건데."
"아이구, 별 소릴. 엄만 소미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지?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우리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게 다 먹었고 뉴스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참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딸과 이어간다는 것은 꽤 힘들다.

그러나 요 근래 소미의 가공할 만한(?) 질문세례에 늘 "소미야,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돼. 소미는 설명해도 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아. 그러니까 너무 미리 알려고 하지 마. 마음만 복잡해져" 이러면서 따돌린 터라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정공법으로 받았다. 내가 또 그랬다면 소미는 "아휴, 엄만 맨날 그 말만 한다"하면서 핀잔을 주었을 게 뻔했다.

전쟁이 길어질 거라는 보도에 마음이 다 어수선하고 심란하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인데도 우리나라의 향후진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하니, 우리가 군인가족이라고 친지 중에 가장 먼저 걱정하는 전화를 해주신 어른도 계셨다.

군인가족이라고 전쟁에 대해 특별히 남다른 시각을 가진 건 없다. 끔찍한 인명살상과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샅샅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낀다. 대통령의 미국 지지와 파병결정, 반전시위와 파병반대시위, 후보시절 대통령을 지지했던 네티즌들의 분노에 찬 지지철회 글들을 두루두루 보면서 내가 드는 생각은 한 가지이다.

"사람들이 모두 제 자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제 할 일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시끄러워도 앞으로 우리나라는 좋아질 것이다"하는 생각. 이것을 근거 없는 낙관이라고 한다 해도 난 그렇게 믿는다.

세계오지여행가에서 국제 NGO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변신한 한비야의 이라크행 출국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세계를 돌다돌다 '일단' 전쟁터에 머무는 그녀의 삶 역시, 한 줌 제 할 일을 낯선 분야에서 용기 있게 찾은 경우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제 할 일을 다하는 그녀 역시 참 아름다워 보였다. 이것도 진정한 평화의 한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