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자궁회귀본능을 위하여

M.미카엘라 2000. 12. 3. 01:00
옛날 우리집 안방에는 수제(?) 이불장이 하나 있었다. 빛 바랜 연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데 아무 조각무늬 하나 없는 밋밋한 문짝에 조그만 손잡이만 나란히 두
개를 달고 있는 그야말로 우직해 보일 뿐 심심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이 이불장은 이불을 넣어두는 용도 말고도 두 가지로 쓰였는데 그 중 하나는 말
안 듣고 우는 애를 올려놓고 벌주는 곳으로 쓰였다. 정말 거기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방음도 기가 막히게 잘 되어서 꼭 멀리서 우는 것 같이
아마득하게 들릴 뿐이다.

주로 언니, 오빠들이 혼내준다고 장난 삼아 나를 올려놓곤 했는데 잠깐이지만 너무
무섭고 숨막혀서 악을 쓰며 꺼내달라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안 울겠다는 약속을
하면 꺼내주는데 나중엔 이것이 극단의 조치라는 걸 알아듣고 들여보낸다 하면 울음을
뚝 그쳤던 것 같다.

그러나 평소에는 더할 수 없이 아늑한 놀이공간으로 제 몫을 다했다. 두 개의 문 중
하나만 닫고 하나는 열어둔 채 그 안에서 노는 맛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거기서 잠드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이 약간 구석진 곳이나 좁은 틈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거기에 어디 그런 틈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도 찾아서 들어앉아 있다.

집에서도 소미와 소은이가 자주 애용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는데 요 며칠은 계속
내가 작업하는 컴퓨터 책상 아래로만 기어든다. 이제 소은이도 제법 커서 둘이 들어
와서는 저희들끼리도 좁아터질 지경인지 이 구석 저 구석에 머리를 슬쩍슬쩍 부딪치다
서로 나가라고 싸우기도 한다. 내 다리는 제대로 편하게 둘 곳 없이 건들대며 방황하고,
좀 저만치 가서 놀라고 해도 듣질 않는다. 그렇게 옹송거리고 앉아 노는 게 그리도
좋은가 보다.

결국 소은이가 손을 뻗어 자꾸 모니터에 달린 여러 가지 단추를 누르는 바람에 나는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좁고 구석진 환경을 찾는 게 아무래도 내
배 안에서 있던 시간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거지 싶어서 어떻게 하면 아늑한
환경을 만들어줄까 잠시 고민했다.

소파였다. 두 사람이 아주 다정하게 붙어 앉아야 딱 좋은 옥색의 낡은 싸구려 2인용
소파였다. 그 소파를 벽에서 적당히 띄웠다. 소미가 들어가서 앉고 일어서는 데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틈이 생기게 벌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아늑한 기분이 물씬
나게 위를 막아주어야 했다.

다행히 소파가 놓인 거실 벽은 압핀이 잘 들어간다. 나는 그 위에 어깨를 덮는 큼직한
정사각형 숄 한쪽 면을 소파 높이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압핀 세 개로 눌러 고정시키고,
반대쪽 끝을 그대로 소파 쪽으로 걸쳐서 늘어뜨렸다. 타탄 체크무늬 지붕이 완성된
것이다. 색깔도 남색 계통이라 그 안이 약간 어두운데 숄과 소파의 길이가 엇비슷해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제 에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두 딸은 그제야 환호를 하며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내가 다시 나오라고 한 후 얇은 조각 이불 하나를 바닥에 깔아주니
소미는 거기서 잠도 자겠다고 했다. 두 애들은 서로 키득대며 놀다가 귤도 거기서
까먹고, 밀가루 반죽 만들어 준 걸로 여러 가지 모양을 틀에 찍어 소꿉놀이도 하고,
인형들을 재운다고 노래도 불렀다. 내 다리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다시 없었다.

아, 참 머리를 잘 썼군 싶은 게 내가 기특해졌다. 촌스런 옥색 소파를 이사가는 어떤
사람이 주었다며 들여온 남편에게 넓게 살자고, 다른 사람 주자고 했었는데 아주
잘 써먹게 된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의 이런 심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기어 들어
가서 앉아 노는 헝겊집을 홈쇼핑 책자에 내놓고 판다. 하도 구석에서 놀고 그러길래
정 뭐하면 하나 살까도 싶었지만 얼마 쓰지도 못할 것 같았고,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고, 또 집이 워낙 좁은 관계로 또 한 채(?)를 구입하긴 어려워서 그만두었다.

어머니의 뱃속에 대한 기억은 평생을 간다고 한다. 기억이 있다기보다 그 느낌을
가져간다는 말일 것이다.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지낸 시간이 짧을수록 더 거기를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다는데, 아마도 내가 그 수제 장롱 안에서 맛본 아늑함을 지금
소미와 소은이가 그대로 느끼는 것이리라. 어처구니 없는 비교일지 모르지만 내 몸
안에 있을 때 느낀 온기와 평화로움과는 얼마나 가까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이 사람이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계속 무의식의 바닥에
깔려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겉으로 본 어른이 된 우리들은 더
이상 구석진 곳이나 틈새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성격이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 이상, 혼자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실컷 울고 싶은 기분이
아닌 이상, 또 부적절한 관계(?)에 놓인 남녀가 아닌 이상 그런 곳을 찾아들 까닭은 없어
보인다.

좀더 넓은 집, 호수가 보이는 곳에 넉넉한 별장 하나라도 있으면 더 고맙고, 지금보다
더 큰 차, 폼 나는 세단이면 바랄 게 없다는 따위의, 상상만 한다해도 늘 이런 식이기
쉽다. 크고 넓고 높고 많고 화려한 게 성공의 잣대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런 세상에서
자궁회귀본능을 말하는 것이 문득 초라하고 남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좁고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곳에 아늑한 휴식과 평화가 있다는 말에 꼭
들어맞는 공간이 자궁 말고 또 있을까. 평화로움 속엔 욕심이 없고 휴식 속엔 여유가
있다. 아무쪼록 천장이 낮고 비좁은 곳에서라도 아이들처럼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어른들이 많아야 할 텐데. 어머니의 자궁을 무의식 속에서 그리워만 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내 삶 속에서 구현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늘 만나고 싶어하는 행복이
아닐까.

소은이가 갑자기 소파 위로 올라가더니 뭘 모르고 자꾸 체크 지붕 위까지 올라가고
싶어한다. 거기가 허당인 걸 모르는 소은이는 그저 신이 난 얼굴이다. 얘야, 높은
데로 오르는 일, 높은 데만 자꾸 보아지는 일 그거 참 피곤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