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보고
이분들과 아직까지 교류하고 있는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다. 출판협회
사무국장을 18년 간 지내시고 책에 대한 책, 책 만들기에 대한 책들을 내느라
현상유지도 어려웠던 작은 출판사를 경영하셨는데 나는 그곳의 두 명뿐인 직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거기서 책을 사랑하는 법, 책에 대한 안목을 많이 배웠다. 선생님(지금은 그렇게
부른다)은 지금은 70을 훨씬 넘기셔서 출판계
원로이시지만, 건강이 많이 상하신
지금도 고향 파주에 고문서박물관을 세우고 돌아가시겠다고 하시니 내보기엔
영원한 현역이시다.
사모님은 평생 초등학교 평교사로 지내시다가 내가 출판사 근무할 때 퇴직하셨다.
할머니 선생님이라 늘 1학년 담임을 맡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는 말씀을
잘 하셨다. 대담하고 솔직한 성격에 무용을 잘하시고 수다가 귀여우신 분이다.
제자들이 자식처럼
드나들어 외로움은 덜하신 듯했다.
슬하에
딸이 없으시니 나를 딸처럼 여겨주셨는데 나도 이분들을 진심으로 부모님
처럼 생각한다. 요즘은 찾아 뵙기는커녕 안부 전화도 부지런하지
못했는데 뜻밖에
전화를 주시니 너무 반갑고 죄송스러웠다.
전화내용은 한 시간 뒤면 방송될 KBS의 <일요스페셜>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보아달란 말씀이셨다. 당신이 박정희
할머니 큰딸의 4학년 담임을 지내셨는데
학부모였던 박 할머니와는 서로 좋아하셔서 교분이 두터우셨다고 했다.
"나도 결혼해서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재형이가 꼭 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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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의 박정희 할머니는 4녀 1남을 기르던 젊은 날에 쓴 육아일기가 있다. 전에도
다른 방송사의 한 20분 짜리 프로그램에서
다루었는데 나는 그때 거의 끄트머리
몇 분만 보고는 너무 애석해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놓치지 않았을 것을 하면서.
그 할머니 이름 석 자도 알 겨를 없이 끝났고, 재방송을 하는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인터넷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자막 같은 것도
없었다. 한참을 안타까워한 기억이
새로운데 다시 그분을 한 시간 짜리 프로그램에서 뵈니 내 기쁨은 더할 수
없었다.
네 권인가 다섯 권인가 하는 육아일기는 낡은 화첩처럼 아름다웠다. 육아일기를
'썼다'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친구가 가져다준
악보 이면지를 꿰매고, 자식들
옷 만들어주고 남은 천으로 표지를 발랐다. 그 안은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림 반, 글 반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돌잔치에 누가 왔는지 어떤 선물과 말로 축하해주었는지 가득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아이들과 노래하고 피난 놀이한 이야기가 있다.
같이 살았던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상하고 아이들에게 만들어 입혔던 원피스며 수영복이며 바지의
디자인과 사이즈가 꼼꼼히 쓰여
있다.
우리 세대도 육아일기를 쓴다.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붙이고 아기의 첫 손톱이며
머리카락도 잘라 붙이며 정성을 다하여 기록한다.
그런데도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가
남다르게 더 가슴 뭉클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아마도 암울하고
절박한 시대적 상황마저도
극복하는 샘솟는 사랑과 타고난 감수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우리들과 할머니 시대의 어른들과 가장 큰 차이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음과 정성'의 양이나 부피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들을 수량이나
부피로 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들에겐 마음과 정성의 양이나
부피가 턱없이 부족하다.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 많고, 귀찮은 일이 너무
많고, 조그만 일에도 힘들어하거나 실망하고 절망하는 일이 잦다. 내가 딱
그러면서 사니 남의 말을 할 필요도 없다.
포탄 피해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절박하고 스무 명이 넘는 시댁, 친정 식구가 한
살림을 했던 피난집을 이끈 사람에게서 나온
감수성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의사라서 먹고 살 만했겠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 배운
집안 사람들이니
그렇게 쓰고 그리고 할 머리가 있었던 게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먹고 살 만하고 배웠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좋아서 하는 일들이 많았고 그걸 표현하려는 정성이 남달랐다.
박정희 할머니는 지금도 아이들이나 이웃에게 그림지도를 하고, 어떤 곳에서는 당신의
육아일기 강좌를 연다. 현재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
아니라도 제 자식 기르던
때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쓰고 그리는 장년층 수강생도 보였다. 할머니는 이담에
자식들이 육아일기를 보면
'아,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느껴지도록 쓰라고
한다. 그걸 꼭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특히 내 마음을 울린 까닭은 내 육아일기가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1호 글에서 "자식자랑하는 글이
안되게 하겠다"고 밝힌 탓에
나는 그동안 사랑스러움, 대견함, 자랑스러움, 경이로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을 표현하는데
인색했다. 사실 이담엔 나나 내 딸들이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뻐근해질 터인데.
제 앞으로 하나씩 엮어진 육아일기를 가진 할머니의 자식들의 행복을 가늠했다.
입에서 나올 감동의 소감은 더 많지만 이제
<군인아내의 육아일기>가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통해 다시 새로워지는 정점에 선 것을 마음깊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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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과 다시 전화통화를 했다. 선생님은 첫부인과 사별하시고 이 사모님과 재혼을
하셨는데 그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하셨다. 전처의
아들을 길러 장가들이고
정성을 다하셨지만 아들은 끝내 오십을 넘긴 나이에 결혼생활에 실패하였다.
너무 몰상식했던 며느리는 두 분과
아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이혼을 통해 돈만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형이, 난 명애(박정희 할머니 큰딸) 어머니와 아주 잘 맞았지. 그이가 만들어준
앞치마 두 개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걸. 명애는
결혼식 때 엄마가 만들어준 한복과
면사포를 쓰고 칠보 반지 하나 끼고 결혼했지. 나는 아들 장가보낼 때 계모라서
그렇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다이아 반지 해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내 식대로 해주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
사모님 말씀이 너무 쓸쓸해서
하마터면 왈칵 눈물이 나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