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과 문화인
현충일을 한 주 당겨 시아버님 묘소를 찾아 대전 현충원을 다녀왔다. 날씨는 무척 뜨거웠고 사람들이 고인 앞에 가져다 놓은 생화는 이미 축 쳐져서 힘겨워 보였다. (남편의) 외할머님과 어머님, 도련님과 우리 네 식구는 한 주 이른 시간이지만 꽤 많은 참배객들 사이에서 참배를 마쳤다. 아직 복더위는 아니라 나무그늘 아래서 쉬는데 꽤 시원했고, 때가 점심이라 김밥 같은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올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충원을 뒤로 하고 시원한 음식을 찾아 들어간 곳은 냉면집이었다. 만두를 곁들여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소미와 소은이가 배가 꽤 고팠는지 더 안달을 부렸다. 아이들 앞으로 주문한 냉면 1인분을 두 그릇으로 나누는데도 국수보다 질긴 냉면이 잘 나눠지지 않아서 또 한 차례 난리를 피우고서야 조용해졌다. 시원하다,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연신 냉면 가닥을 빨아들이던 소미가 먼저 뚝딱 그릇을 비우고 소은이는 면발 몇 가닥과 삶은 달걀 반쪽만을 동동 띄워두고는 확연히 속도가 줄었다.
어른들이 만두까지 모두 비워갈 무렵이었다. 남편이 냉면 국물에 젓가락만 빠뜨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있던 소은이에게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듣지 못했을 것 같은 소은이의 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거의 반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맨손 그대로를 냉면국물에 푹 집어넣더니 달걀을 건져 올려 그대로 입으로 직행,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 우리가 '아냐, 아냐, 소은아. 농담이니까 걱정 말고 천천히 먹어' 하면서 말릴 틈도 없었고, 소은이 저도 '잉, 내가 먹을 거야잉'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걸 함께 봤던 우리 식구들은 예의도 없이 냉면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특히 어머님은 삶은 달걀 반쪽에 완전히 목숨을 건 소은이에게 탄복을
하셨다. '저거 보통이 아니다' 하시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소은이를 거들었다.
그날 밤 10시쯤 집에 도착했다. 남편과 낮에 차안에서 한숨도 자지 않았던 소미는 오자마자 씻고 잠들었고, 소은이와 나만 깨있었다. 나도 자고 싶었지만 낮잠을 두 시간 넘게 잤던 소은이 눈이 말똥말똥하니 어쩔 수 없이 함께 깨어있게 되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 교육방송의 근사한 공연물에 멈추었다. 지난 4월에 내한했던 아이리쉬 댄스 뮤지컬 <스피리트 오브 더 댄스>였다. 사실 꼭 실황공연을 보고 싶어서 티켓을 예매하는 사이트까지 들어갔다가 포기했던 공연이다. 서울 언저리로 이사왔으니까 이런 공연물도 가끔 보자 했는데 남편과 둘이 보려니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저녁 시간을 좀체 낼 수도 없었다.
뮤지컬이라고 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뮤지컬이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의 화려한 탭댄스에 플라멩코, 고전발레, 살사, 재즈댄스 등을 고루 혼합한 댄스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손보다는 발의 움직임이 화려한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발끝을 착착 맞춰 한치 오차 없이 추는 화려한 군무는 비록 텔레비전에서였지만 탄성을 지르게 하기 충분했다. 전통적인 춤에 기반을 두었지만 첨단기술의 조화까지 엿보이는 '퓨전댄스'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건강미 넘치는 무용수들의 다이내믹한 동작이 스트레스를 확 날려주는 기분이었으니, 실제 공연을 못 본 아쉬움이 뒤늦게 새록새록 생겼다.
그런데 나도 나지만 소은이가 이 공연을 찍소리도, 곁눈질도 안 하면서 열심히 보는 것이다. 어리긴 해도 화려하고 힘차고 빠른 스피드가 가득한 춤에 넋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소은아, 재밌니?"
연신 탄성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무용수 전원이 관객과 가장 가까운 무대 끝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걸터앉아, 하얀 장갑을 끼고 순전히 목과 손만 써서 기막힌 '손댄스(?)'를 보여주었는데, 소은이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압도당했다.
"소미 언니 불쌍하다."
소은이는 다음 날 유치원에 다녀와서 소미에게 어제 본 공연에 대해 늘어지게 자랑을 했다. 소미는 제 방식대로 열심히 설명한다고 하나,
어휘는 달리고 감동 받은 기분만 앞서 육하원칙이 듬성듬성 빠진 알 수 없는 표현을 하는 소은이에게 짜증을 냈다.
나는 스물스물 웃음이 나왔다. 춤 공연 한편에 감동 먹고 뭐라고 열심히 떠드는 소은이 얼굴 위로 냉면국물에 손을 푹 집어넣어 삶은 달걀을 집어먹던 소은이 얼굴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