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왕비의 새해 육아 백서(白書)

M.미카엘라 2001. 1. 1. 03:45
지난 수요일 아무렇게나 틀어 올렸던 긴 머리를 짧은 커트 머리로 정리했다. 3월
쯤에나 봄기분 내면서 변화를 주려고 했었는데 생각을 바꿔서 조금 앞당겼다. 새해가
다가와도 여전히 조금 무거운 머리, 머리칼 무게라도 줄여 가벼워보자는 심산이었는데
다행히 기분전환이 많이 되었다.

새해를 혼자 맞는다. 옆에 남편도 있고 두 딸도 있지만 모두 12시가 되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아이들이 잠들면 남편과 맥주나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새해를
맞으리란 계획으로 맥주도 사고 쥐포도 넉넉히 사두었는데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맥주 한 캔 정도야 혼자 마시는 맛도 좋을 텐데 그런 일엔 좀체 익숙하지 않다.

저녁을 먹고 은근히 내 계획을 알렸건만 그 좋아하는 <태조 왕건>을 보다가 자고
있었다. 속으로 좀 부아가 났다. 딸들은 집안을 온통 어질러놓고 금방 잘 기미가 없었다.
한해가 가는지 새해가 오는지 알지도 못하는 두 아이는(아, 소미는 하룻밤만 자면
다섯 살이 된다는 걸 안다) 그저 먹고 어지르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자주 요구했다.

생각해 보면 12월 31일과 1월 1일이 뭐 그리 다른 차이가 있을까. 그리 호들갑스러울
것도 없다. 그 사이를 잇는 아주 길고 험한 다리가 있어 거길 모두 함께 걸어서 건너야
새해가 오는 것도 아닌데. 새 달력이 주인의 취향에 맞게 새로 걸린다는 게 가장
큰 변화일까? 그래서 새해 첫날의 육아일기도 독자들이 "뭐 이리 밋밋해?"할 정도로
평상심으로 보통처럼 쓸 생각이었다. 송구영신을 말하는 분들, 복을 빌어주는 분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몫이 있다. 어떤 새 기운과 좋은 결심을 드러낸다는 게 얼마나 다른
사람까지 즐겁고 힘차게 만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나름대로 내 속을 정리하고
단련시키는 데는 의미가 있다고 믿고 쓴다.

소미는 요즘 자주 "엄마, 소미 이뻐요?" 소리를 잘한다.
"당연히 언제나, 늘 이쁘지. 소미가 '엄마, 미워' 그래도 엄마는 '그래도 소미 이뻐'
그러잖아. 그치?"
그러다가 한번은 왜 자주 그렇게 묻느냐고 되묻자, "엄마가 소미를 안 이뻐하는 것
같애서" 이런다.

참으로 어떤 표현이라는 게 늘 상대방의 마음에 모두 가 닿는 것은 아니로구나 하는
걸 느낀다. 일주일을 넘기고 있는 소미의 방학중에 나는 아이와 다투지 않고 소리를
높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신경을 쓰고 노력했다. 일부러 소은이는 재껴두고, 혹은
소은이를 타박하면서 제 역성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아주 조용하고 유쾌한
모녀 사이였는데 이런 난감한 대답을 듣고 말았다.

내가 표현하는 애정이 아이의 마음속에 완전히 닿을 때까지가 그렇게 간단한 과정이
아님을 느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이는 자꾸 갈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내 입이 다 조금 마르는 것 같았다. 사실 돌이켜보면 바쁘다면서
잘 눈여겨보지도 않고 겉치레로 칭찬하고 예쁘다고 하고 잘한다고 했던 것들을 속속들이
꿰어 들킨 것이다.

소미는 내게 올해의 화두를 안긴 셈이다. 서운해하지 않고 '표현의 진정성'을 까탈스럽게
저울질하며 이 어미를 독려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은이도 요즘은 제법
말로서 자기 뜻을 표현한다. 이제 두 아이의 맑은 네 개의 눈동자가 내 속을 꿰뚫는다
생각하니 건성으로 할 일이 없어졌다.

갑자기 소미가 무슨 스티커로 눈 한쪽을 덮듯이 붙이고 이랬다.
"엄마, 나 태조'앙'건 같지요?"
"흐흐, 그렇게 눈을 한쪽 가린 사람은 왕건이 아니라 궁예라는 사람이야."
"근데 왜 저 할아버지들이가 폐하 그래요? 폐하가 뭐에요?"
"임금님이나 왕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는 거야."
참으로 궁금한 것도 부쩍 늘었다. 이 오만 가지 궁금한 것을 조근조근 풀어줄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두어야겠다. 이거 잘만 하면 어린아이와도 아주 재미있는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갈 수 있다. 조카가 어릴 때 경험했던 터라 그때의 온갖 상상력과 대화법을
모두 떠올려보았다.

오늘은 두 공주의 잠든 얼굴이 유난히 이쁘다. 딸들이 공주가 된 사연은 소미 살결이
너무 보들거리고 좋아서 내가 '보들공주'라고 불렀더니 소미가 "그럼 소은이는 맨날
가렵다고 긁고 살이 꺼칠거리니까 꺼칠공주예요?"라고 한 데에 있다. 이제 어미된 이
왕비는 혼자서라도 요 제멋대로 포즈로 잠든 어린 공주들을 감상하며 시원한 맥주
한 캔만 해야겠다. 흘러간 팝송이나 찾아서 풍악을 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