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노란 자전거
M.미카엘라
2001. 1. 18. 11:30
"엄마, 나 자전거 타고 갈래."
"아주 가까운 데 가는 건데 뭐. 우리집 뒤 3동에 가는 거야."
"그래도 타고 갈래."
"오르막길이 있어서 엄마가 잡아주기도 힘들어. 그냥 걸어서 가자. 민들레꽃도
보면서. 저기 아주 많이 피었더라. 응?"
"히잉, 알았어."
순순히 포기를 해줘서 다행이었다. 약속시간이 촉박한데 더 실랑이를 벌였다간
좀 늦을 것 같았다.
소미에게 '비로소' 자전거가 생겼다. 노란 자전거. 아주 타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계속 황사바람이 심한 날씨 탓에 금족령을 내렸더니, 신발 벗어두는
현관에 간신히 둔 자전거의 앞뒤 좌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밖에 나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벌써 이틀째 그러고만 있다.
자전거는 내가 2월에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주워다 놓은 고물에 가까운 중고
자전거다. 세발 자전거를 졸업하면 처음 타는 단계일 듯한 보조바퀴 달린 작은
두발 자전거였다. 체인도 없는. 칠은 다 벗겨지고 안장은 그림부분이 다
찢어진 건데 눈 위에 놓여 있어서 바퀴가 땅과 살짝 얼어 있었다. 힘을 좀
들여 떼내어서 굴려보았더니 보조바퀴는 한쪽씩만 닿았지만 그런대로 굴러갈
정도로 쓸 만했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안정감 있게 즐겨 타려면 더 커야
할 것 같아서, 그동안은 대강 이걸로 흉내내며 배우게 하자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져왔다.
소미는 헐어빠질 대로 헐어빠진 자전거를 볼 때부터 좋아라 했다.
"이거 소미 꺼야? 소미 자전거야? 와! 좋다."
"좋니? 아빠보고 날씨 따뜻해지면 예쁜 색깔로 칠해달라고 하자. 무슨 색깔이
좋을까? 소미가 생각해 놔."
"음, 초록색. 소미는 초록색이 좋드라."
이러면서 능청을 떨어댔다. 제 아빠도 보곤 흔쾌히 칠해주마고 약속을 했다.
계속 바쁘고 날씨도 궂고 해서 미루다가 지난 토요일에 비로소 페인트를
사러 갔다. 애초에 초록색을 칠해달라고 했던 자전거 주인은 자긴 노랑색이
참 좋다나 하면서 홀딱 바꿔버렸다. 그래서 6000원 짜리 노란색 페인트를
한 통 샀는데, 페인트 가게 할아버지가 꼬마 자전거 칠할 거라고 하니까
붓을 공짜로 주셨다.
작업은 소미 아빠가 소미를 데리고 부대에 가서 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걸쳐 두 번 칠을 하고 드디어 가져 왔다. 참 궁금했다. 그런대로 이뻤으면
하는 야무진 꿈을 꾸고 기대했던 것이다.
소미가 "엄마, 내 자전거 아빠가 노란색으로 다 칠해서 가져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생각보단 별로 안 이뻤다. 그도 그럴 것이 안장은 찢어진
비닐만 한겹 벗겨내고 칠하지 않았고, 바퀴도 낡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뼈대만 칠한 것이다. 그래도 쓸 만해 하며 나는 조그만 분홍색 조화 뭉치를
손잡이 부분에 달아주고, 제 아빠는 '누가 줘도 안 가져갈 몰골'을 한 이
자전거에 이쁜 명찰까지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이거 타고 있는 거 사진 꼭
한 장 찍어줘" 했다. 소미는 생각보다 훨씬 좋아했다.
나도 어릴 때 누가 준 옷을 참 좋아했다. 엄마도 언니들도 "우리 막내는 남이
거져 길렀다"고 할 정도로 결혼할 때까지 번듯한 옷을 사 입은 기억이 몇
번 없다. 옷에 대한 추억으론 다섯 살 많은 바로 위 언니가 반추하는 것이 있다.
내가 바람이 무진장 매서웠던 대학 졸업식날, 따뜻하고 예쁜 코트 한 벌 없이
자기가 짜서 잘 입고 다녔던 구멍 숭숭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때 그것을 깨달았다면 어떤 돈으로라도 자기가 사주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럼 난 그때 어땠나. 우리 엄마는 '찢어지게'는 아니라도 자식이 많으니까
늘 '부족한 날이 더 많은 빡빡한' 살림살이를 꾸려오셨다. 늘 그렇게 사는
일에 익숙하니까 솜씨 좋은 우리 언니의 손뜨게 옷을 입는 일이 즐거웠지,
그래도 졸업식인데 좀 썰렁하고 초라한 행색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언니나 나나 한창 멋부릴 땐데도 그냥 대강 입었다. 내가 여고 때부터
둘이 자취하며 국립극장 공짜표 같은 것 구해 이런저런 공연물을 구경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웠다. 생각하면 우습지만 언니의 쥐꼬리 월급으로
월세 내고, 잡비 내고, 연탄 사고, 교통비 쓰고 하며 살았으니 계절 맞춰
옷을 갖추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우린 오순도순, 희희낙락 재미나게
자취생활을 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긴 하다. 그러나 역시 좀 부족한 환경이
사람을 더 씩씩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소미에게
이것저것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싶다가도 문득 정신차려 브레이크를
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남편도 이 부분에선 나와 생각이 일치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우스운 노란 자전거'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날 밤, 소미는 제 아빠와 침대에 누워 행복한 목소리로 이랬다.
"아빠가 정말 최고야, 최고."
"왜?"
"왜냐며언, 음, 왜냐며언 아빠가 최고니까."
제 아빠 자지러지게 좋아하는데 나는 콧웃음을 쳤다.
"박소미! 자전거 때문이라면 애초에 그건 엄마가 만든 작품이라는 거 잊지
말아라. 참내, 부녀지간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
"아주 가까운 데 가는 건데 뭐. 우리집 뒤 3동에 가는 거야."
"그래도 타고 갈래."
"오르막길이 있어서 엄마가 잡아주기도 힘들어. 그냥 걸어서 가자. 민들레꽃도
보면서. 저기 아주 많이 피었더라. 응?"
"히잉, 알았어."
순순히 포기를 해줘서 다행이었다. 약속시간이 촉박한데 더 실랑이를 벌였다간
좀 늦을 것 같았다.
소미에게 '비로소' 자전거가 생겼다. 노란 자전거. 아주 타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계속 황사바람이 심한 날씨 탓에 금족령을 내렸더니, 신발 벗어두는
현관에 간신히 둔 자전거의 앞뒤 좌석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밖에 나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벌써 이틀째 그러고만 있다.
자전거는 내가 2월에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주워다 놓은 고물에 가까운 중고
자전거다. 세발 자전거를 졸업하면 처음 타는 단계일 듯한 보조바퀴 달린 작은
두발 자전거였다. 체인도 없는. 칠은 다 벗겨지고 안장은 그림부분이 다
찢어진 건데 눈 위에 놓여 있어서 바퀴가 땅과 살짝 얼어 있었다. 힘을 좀
들여 떼내어서 굴려보았더니 보조바퀴는 한쪽씩만 닿았지만 그런대로 굴러갈
정도로 쓸 만했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안정감 있게 즐겨 타려면 더 커야
할 것 같아서, 그동안은 대강 이걸로 흉내내며 배우게 하자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가져왔다.
소미는 헐어빠질 대로 헐어빠진 자전거를 볼 때부터 좋아라 했다.
"이거 소미 꺼야? 소미 자전거야? 와! 좋다."
"좋니? 아빠보고 날씨 따뜻해지면 예쁜 색깔로 칠해달라고 하자. 무슨 색깔이
좋을까? 소미가 생각해 놔."
"음, 초록색. 소미는 초록색이 좋드라."
이러면서 능청을 떨어댔다. 제 아빠도 보곤 흔쾌히 칠해주마고 약속을 했다.
계속 바쁘고 날씨도 궂고 해서 미루다가 지난 토요일에 비로소 페인트를
사러 갔다. 애초에 초록색을 칠해달라고 했던 자전거 주인은 자긴 노랑색이
참 좋다나 하면서 홀딱 바꿔버렸다. 그래서 6000원 짜리 노란색 페인트를
한 통 샀는데, 페인트 가게 할아버지가 꼬마 자전거 칠할 거라고 하니까
붓을 공짜로 주셨다.
작업은 소미 아빠가 소미를 데리고 부대에 가서 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걸쳐 두 번 칠을 하고 드디어 가져 왔다. 참 궁금했다. 그런대로 이뻤으면
하는 야무진 꿈을 꾸고 기대했던 것이다.
소미가 "엄마, 내 자전거 아빠가 노란색으로 다 칠해서 가져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생각보단 별로 안 이뻤다. 그도 그럴 것이 안장은 찢어진
비닐만 한겹 벗겨내고 칠하지 않았고, 바퀴도 낡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뼈대만 칠한 것이다. 그래도 쓸 만해 하며 나는 조그만 분홍색 조화 뭉치를
손잡이 부분에 달아주고, 제 아빠는 '누가 줘도 안 가져갈 몰골'을 한 이
자전거에 이쁜 명찰까지 달아주었다. 그러면서 "이거 타고 있는 거 사진 꼭
한 장 찍어줘" 했다. 소미는 생각보다 훨씬 좋아했다.
나도 어릴 때 누가 준 옷을 참 좋아했다. 엄마도 언니들도 "우리 막내는 남이
거져 길렀다"고 할 정도로 결혼할 때까지 번듯한 옷을 사 입은 기억이 몇
번 없다. 옷에 대한 추억으론 다섯 살 많은 바로 위 언니가 반추하는 것이 있다.
내가 바람이 무진장 매서웠던 대학 졸업식날, 따뜻하고 예쁜 코트 한 벌 없이
자기가 짜서 잘 입고 다녔던 구멍 숭숭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때 그것을 깨달았다면 어떤 돈으로라도 자기가 사주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럼 난 그때 어땠나. 우리 엄마는 '찢어지게'는 아니라도 자식이 많으니까
늘 '부족한 날이 더 많은 빡빡한' 살림살이를 꾸려오셨다. 늘 그렇게 사는
일에 익숙하니까 솜씨 좋은 우리 언니의 손뜨게 옷을 입는 일이 즐거웠지,
그래도 졸업식인데 좀 썰렁하고 초라한 행색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언니나 나나 한창 멋부릴 땐데도 그냥 대강 입었다. 내가 여고 때부터
둘이 자취하며 국립극장 공짜표 같은 것 구해 이런저런 공연물을 구경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세웠다. 생각하면 우습지만 언니의 쥐꼬리 월급으로
월세 내고, 잡비 내고, 연탄 사고, 교통비 쓰고 하며 살았으니 계절 맞춰
옷을 갖추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우린 오순도순, 희희낙락 재미나게
자취생활을 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긴 하다. 그러나 역시 좀 부족한 환경이
사람을 더 씩씩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소미에게
이것저것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싶다가도 문득 정신차려 브레이크를
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남편도 이 부분에선 나와 생각이 일치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우스운 노란 자전거'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날 밤, 소미는 제 아빠와 침대에 누워 행복한 목소리로 이랬다.
"아빠가 정말 최고야, 최고."
"왜?"
"왜냐며언, 음, 왜냐며언 아빠가 최고니까."
제 아빠 자지러지게 좋아하는데 나는 콧웃음을 쳤다.
"박소미! 자전거 때문이라면 애초에 그건 엄마가 만든 작품이라는 거 잊지
말아라. 참내, 부녀지간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