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손의 솜씨

나 스키도 타요!

M.미카엘라 2001. 1. 28. 03:25
명절이면 우리는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오신다. 군인 아들, 며느리가 때마다 어머님을
찾아 뵙기 어려워서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님 오시기 전부터 식혜 만들랴 전 부치랴 바빴다. 그런데 아이들까지 집에 있는
물건 있는 거 없는 거 없이 죄 늘어놓고 노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두어 개의
선물꾸러미를 모두 펼쳐 놓고 지들끼리 뭐라고 떠들며 신이 났다.

소은이는 화장품이 든 상자를 모두 분해해서 그 조그만 종이 상자에 궁둥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그리고는 뚜껑이 그대로 닫혀 있는 화장품 병을 들고 열심히 손에 덜어서
찍어 바르는 시늉을 했다. 뚜껑을 열어달라고 떼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것만
가지고도 아주 잘 놀았다.

소미는 참치캔 열두 개가 든 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참치를 모두 빼서 이리저리
늘어놓았다가 쌓았다가 했다. 둘은 그러면서 각자 몰두하며 한참동안 싸우지도 않고
잘 놀았다.

한참 후 소미가 나를 막 불렀다.
"엄마, 나 스키 타는 거예요. 엄마, 저 좀 보세요. 멋지죠?"
정말 고개를 돌려서 성의 있게 바라보는 일조차도 번거로울 정도로 바빴지만, 애타게
봐달라고 불러대는 소리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흘끔 보았더니 참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 하나 있었다.

참지 상자에는 참지캔 하나 하나를 고정시키는 칸막이가 있다. 좁은 골판지를 반으로
접은 것 다섯 개가 열두 개의 참치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소미는 그 중
네 개를 뽑아서 두 개는 발바닥에 깔고 서고, 나머지 두 개는 손에 들고 섰다. 거기에
어디서 보았는지 무릎보호대랍시고 크고 둥근 포장테이프와 셀로판테이프를 각각
무릎까지 올려 끼웠다(아래 사진 참고).

자긴 지금 스키를 타는 거라고 폼도 어설프게 내보는데 웃음이 절로 났다. 어릴 때
대나무 얇게 깎은 것을 발 밑에 두고 얼음판 위에서 놀던 기억이 났다. 긴 썰매 꼬챙이를
빌려서 찍으며 미끄러지듯 잘 타보려고 했지만 잘 안되어 속이 상했던 생각도 났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사진으로 남겨두어야겠다 싶어서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 내고
카메라를 들었다. 소미가 조금 더 어릴 때도 스스로 생각해낸 놀이가 있다. 사진으로도
몇 장 남겨두었는데 지금 봐도 아주 유쾌해진다.

사람마다 아이들이 예쁘다고 느끼는 때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이럴 때 어느 집
아이든 아주 예쁘다. 어른들이 이거 해봐, 저거 해봐 해서 재롱을 떨 때보다, 보아줄
사람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무심코 한 일인데 어린 아이치고 기발한 생각이나 행동을
표현했을 때. 고 작은 머리 속에서 어떻게 조렇게 재미있는 생각이 나올까 싶은 게
너무 놀랍고 귀여워서 콱 찐하게 안아주고 만다.

아이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거나 어떤 무대체질을 갖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여우가 되는 지름길로 가는 증거이기 쉽다. 좋게는 '끼'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아이가 벌써부터 행동을 예사로 하지 않고 미리 계획하거나 꾸밀 수 있다는 점에서
그다지 예쁘게 보아지지 않는다.

아이다운 생각주머니를 부풀려주는 일. 어른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큰
숙제인데 적잖이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이 숙제의 답안지를 머리 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하려고 요즘 꽤 노력을 하고 있는데 참 어렵다. 해답은 있지만 정답은
없고 정도는 있지만 왕도는 없는 그런 답안이 되기 쉽다는 것만 감 잡고 있다.

*사진: 스키, 색연필 아이스크림 장수, 멜빵 청진기, 요리도구 카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