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미카엘라 2001. 2. 3. 18:26
친정 어머니는 참 드물게도 설날이 생신이다. 그런데 설에 친정 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막둥이를 생각하신 것인지 아버지는 설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 벌써
5주기를 맞았다. 아버지 기일도 보면서 엄마 생신을 뒤늦게라도 축하해 드리란 배려처럼
느껴진다.

기일 며칠 앞서 갔기 때문에 나는 좀 여유가 있었다. 온 김에 초등학교, 중학교를
줄곧 같이 다녔던 오랜 친구 Y의 집을 찾았다. 중학 모교 옆 아담한 이층집에서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가까운 곳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Y의 큰아이 단하는 소미보다 두어 달 먼저 태어났다. 동갑내기니까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않으면서 싸우지도 않고 너무 재미있게 잘 놀았다. 작년 여름에 한 번 만나서
잘 놀더니 서로 머뭇거림도 없이 곧 친해졌다.

단하에겐 13개월 짜리 동생 진수가 있는데 신체나 행동발육이 참 빨랐다. 꽤 큰
미끄럼틀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미끄럼대로도 그냥 잘 올랐다. 그러니 규칙을 잘
지키면서(?) 계단으로 오르는 소은이와 자주 부딪쳤는데 소은이가 그 덩치에서 밀리면서
잡음이 잦았다. 한동안은 그것 조율하고 다치지 않게 돌보느라 우리 둘은 제대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들었다.

소미와 단하는 소꿉놀이, 병원놀이, 선생님 놀이를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둘은 크레파스를 들고 나름대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거기에 소은이와
진수가 빠질 수 없는 일.

소은이는 크레파스 두 개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언니들이 스케치북에서 조금 떨어지는
시간을 틈타 찍찍 조금 그리고는 물러났다. 그만만 해도 눈치가 생겼다. 그런데 진수는
그냥 스케치북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서기도 하고 크레파스를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Y와 나는 아이들과 다시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스케치북 한 면이 꽉 차게 그림을 큼직하게 그리는 단하에게 내가 물었다.
"단하는 어떤 색을 제일 좋아하니?"
"분홍색이요."
나는 보라색 크레파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응, 그래? 소미는 보라색이 제일 좋다고 하던데."
그랬더니 단하가 망설임 없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아, 가지색이요?" 이러는 거다.

내가 웃을 사이도 없이 소미가 "아냐, 이건 보라색이야"하고 받아쳤다. 단하도 지지
않고 계속 가지색이라고 했다. 한참 가지색이라거니 보라색이라거니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나는 가지색도 맞다 해주고는 다른 색깔들을 더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단하는 너무
재미있는 이름들을 줄줄이 읊었다.

노랑색은 바나나색, 주황색은 당근색, 초록색은 파색, 빨강색은 피색, 하늘색은 구름색,
갈색은 나무색 등이다. 피색의 어원(?)을 Y에게 들었다. 내내 빨강색이라고 하다가
한번은 단하가 제 코에서 코피가 나는 것을 보고 그 다음부터 담박 빨강색을 피색이라고
하더란다. 그러다보니 단하의 크레파스들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인 때문에 자주
개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초록색이 언젠가는 배추색일 때도 있었다나?

우리가 어릴 때는 주황색을 귤색, 회색을 재색 정도로 말할 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리 특별할 건 없다. 헌데 단하의 색깔 찾기는 제 생활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에
아주 귀엽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색깔을 그렇게 익히다보니 아직 크레파스
기본색 이름을 다 익히지 못했다니 더 귀여워져서 한참을 웃었다.

내가 너무 귀엽고 재미있다고 웃어대니 소미는 옆에서 열심히 이건 빨강색, 이건
주황색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에구, 한번 잘난척하게 해주자 하고는 내가 손가락으로
크레파스를 짚으면서 소미보고 색깔이름을 말하라고 했다. 신나게 한 번 주르륵 꿰고
나서야 색깔 공방은 끝이 났다.

Y는 그냥 수더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이를 기르는 것 같았다. 뭐 그리 자상하고
곰살 맞게 아이에게 잘한다는 느낌은 적었지만, 있는 그대로 그다지 욕심 없이 조용조용
했다. 무엇보다도 자주는 아니라고 하지만 온몸으로 놀아주는 모습이 아주 좋아 보였다.
사실 부모 중엔 아이들이 원하는 걸 모르는 경우보다 뭘 좋아하는지를 잘 알면서도
귀찮아서 힘들어서 안 해주는 경우가 더 많다.

Y는 나무를 깔아서 반들반들한 2층 거실에서 진수를 업었던 포대기를 쫙 펼치고는
소미, 단하, 소은이, 진수를 번갈아 가며 혹은, 둘씩 묶어서 앉히고는 양끝을 잡아
끌어주었다. 온 거실을 빠르게 쓸고 다니며 태워주니 아이들은 너무 좋아 그냥 자지러졌다.
소은이는 그냥 구경만 할 때도 침을 질질 흘려가며 깔깔댔다.

Y더러 좀 쉬어라 하고 내가 끌어주는데 만만하게 손쉽지가 않았다. 한 두어 번 정도만
돌았는데도 몸에서 열이 났다. 그런데도 Y는 또다시 한참동안 그렇게 아이들의 넋을
나가게 했다.

포대기 썰매는 소미에게 무진장 재미있는 새로운 경험이었던 모양이다. 저녁에 외할머니
께도, 그 다음날 가까이 사는 큰언니 집에 갔을 때도 "Y이모가 애기 포대기에다 막
태우고 씽씽 달렸는데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Y는 단하, 진수와 그렇게 자주 놀아주는 모양이었다. 얇은 담요에 아이를 눕히고
남편과 마주 양쪽 끝을 잡고 번쩍 들어 흔들어준다고도 하는 데선 아, 하고 무릎을
쳤다. 어릴 때 오빠들이 나에게 해주었고 조카들이 어릴 때 내가 언니랑 해준 것이기도
하다. 그게 왜 새삼스럽게 이제 생각났나 싶었다. (나도 좀 해보아야지.)

아무튼 그 덕분인지 단하는 둥글둥글 성격도 원만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터무니없는
떼를 쓰는 일도 적어 보였다. 양보도 잘 하고 어린아이인데도 좀 느긋하고 점잖기까지
했다.

귀여운 단하와 소미가 가까이 살면서 자주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는 게 아쉽기만
했던 친정 나들이였다. 좀 따뜻해지면 Y가 단하만이라도 데리고 우리 집을 찾겠다니
위로가 되고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