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보고 싶으면 보렴

M.미카엘라 2004. 2. 2. 17:20
 

 주말에 친정을 다녀왔다. 설에 친정 가는 일은 아예 마음을 접은 지 오래지만, 설과 친정엄마의 생신이 하루 한 날이라 결혼 이후 설에 가지 못하는 마음은 늘 두 배로 짠하다. 더구나 이번 생신에는 노환으로 아주 눕게 되신 엄마와 차례상도 차리지 않는 설(집안에 누워계신 환자가 있으면 상을 차리지 않는다 한다)의 쓸쓸함이 가슴을 더욱 짓눌렀다. 

 

 범띠 1월 1일생.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이라고 앞 다투어 입에 침이 마르게 말들을 하셨을 것이 분명한데, 그 정월 초하루에 여자아이를 받은 어른들의 얼굴이 어땠을까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사주고 역술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보았을 때 이보다 더 대가 센 여자아이의 사주가 또 있을까.

 

 우리 엄마는 그렇게 태어나셔서 평생 생일상 한번 바르게 받아보지 못하셨다. 차례 음식이 생일 음식이고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이 그대로 산 사람을 축하하는 음식이 되었다. 평생 남에게 번거로운 일시키는 걸 죽도록 싫어하셨던 성품답게 자신의 그런 출생을 자손들에게나 자신에게나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왔다.

 

 나는 엄마가 대가 센 여자였는지, 기가 센 여자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총명함과 강단 있는 성격을 빛내줄 배움이 적었던 것이 당신에게나 우리 자식들에게나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구나 외할아버지가 와세다 대학을 나온 양반이었는데도 딸들의 교육에 대해 그렇게 고루하게 대처했다는 점은 못내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제는 나빠진 건강 때문에 그마저도 분에 넘치는 푸념이다. 사시는 날까지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큰 기원이 될 정도로 엄마는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신다. 누운 채로 정신만 맑다. 말을 하실 수 있지만 말도 잘 안 하시고 그렇게 맑은 정신으로 누워서 하루를 보내신다.

 

 나는 일요일 낮에 가까이 사는 큰언니와 엄마를 목욕시켜 드렸다. 목욕 시켜드리고 돌아서는 길은 무언가 큰일을 해낸 기분에 마음이 가벼워지지만, 거의 올케언니와 오빠가 해온 일인 터라 어쩌다 한 번 목욕시켜드리는 일은 일 축에도 못 낀다. 매달 소용되는 성인용 기저귀를 내가 대기 시작한 지 몇 달 된 걸 두고 오빠와 큰언니는 늘 고맙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내 대답은 ‘이런 경우는 돈으로 하는 일이 가장 쉽다’였다.

 

 나는 엄마를 목욕시켜 드릴 동안 소미와 소은이가 남편이랑 좀 얌전히 오빠네 방에서 텔레비전이나 보았으면 했다. 그러나 이미 눈치를 챈 소은이가 집요하게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빠랑 저쪽 외삼촌 방에 가서 텔레비전 봐! 외삼촌하고 외숙모 안 계시니까 편하게. 응?”

 “싫어. 나도 볼 거야.”

 “뭘 본다고….”

 “나도 할머니 목욕시키는 거 볼 거예요.”

 “에이, 그냥 방에 가서 놀아라. 응?”

 “싫어. 나도 본다니까.”

 

 나랑 옥신각신 한참 실랑이를 하는데 큰언니가 “괜찮아. 그냥 보라고 해. 어때, 할머닌데”했다. 나는 아이들이 그냥 아이들답게 하는 소리라도 정신이 맑으신 엄마가 듣기에 상처가 될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처음 엄마가 아주 눕게 되셨을 때 성인용 기저귀를 두 뭉치 사들고 가는 길에, 아이들에게 ‘사람이 늙으면…’하는 말을 시작으로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한바탕 인간 생로병사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하는 마음이 남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은이는 엄마 옷을 모두 벗길 때부터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면서 소란이었다. 소미는 처음 한두 번 물을 끼얹을 때만 보다가 곧 흥미를 잃고 방으로 가버렸지만 소은이는 달랐다. 그 입을 막고 서있을 수도 없고 할머니는 살이 왜 저렇게 쪼글거리냐, 가슴이 왜 저렇게 생겼냐 하는 온갖 질문의 폭포수를 그대로 맞고 있어야 했다.

 

 목욕이 얼추 마무리되어 갈 무렵 나는 소은이보고 슬리퍼를 신고 가까이 오라고 했다. 구경만 할 게 아니라 거품타올로 할머니 다리 좀 닦아드리라고 시켰다. 제 큰 이모 들으라는 말로 “우리 소은이가 어른 일 돕는 걸 좋아해요. 한번 보세요 이모”하면서 슬슬 부추겼더니 처음에 쭈뼛쭈뼛 대다가 곧 다가와 슬슬 문질렀다.

 

 조금 하다가 곧 내게 타올을 뺏기고 말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성교육 전문가 구성애 씨의 책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목욕하는 분위기가 애초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집이라면 딸이 스스로 제 몸을 삼가고 가리는 시기 이전까지는 그냥 함께 목욕하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던 말.

 

 소은이를 보면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 몸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고 아이를 격리시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아이들의 괜한 호기심만 부추기면서 ‘별난 일’ ‘특별한 일’ 그래서 결국 ‘할머니 일은 나와 관계없는 일’로 만드는 꼴이 되겠다 싶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할머니에게서 더 멀어진다. 할머니 몸도 만져보게 하고 쭈글쭈글한 배를 쭈물쭈물 재미있게 갖고 놀게 하는 것도 뭐 나쁘랴 싶었다.

 

 실제로 소은이는 거품타올로 할머니 다리를 문지르고 만지고 하는 일을 한 차례 해보고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이 그대로 방으로 가버렸다. 옷 입혀드리고 머리 말려드리고 하는 일을 보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할머니의 목욕이 더 이상 이상한 일도 호기심 가득한 일도 아니고 그냥 ‘목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다음번엔 욕실에 들어와서 구경하는 일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생활로 받아들이는 표시라고 본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목욕을 보게 함으로써 내게 작은 깨달음을 준 큰언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시집간 큰언니가 엄마 같다고 느껴진 날이다. 

 

 

* 큰언니가 조카들과 한 장

큰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