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쌈닭 두 마리

M.미카엘라 2001. 4. 4. 10:22
같은 월령이거나 앞뒤로 한두 달씩 차이가 나는 또래끼리는 참 놀기가 좋다. 서로
아이들끼리 싸워도 엄마들은 좀 느긋하다 못해 알아서 해결하길 바라는 무관심의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나도 좀 그렇게 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 사회성이 발달한다 싶은 만 3세 이후의 아이에게나 해당되는
경우다. 적어도 그만큼은 커야 양보도 할 줄 알고 먼저 사과도 하게 되면서 트러블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지, 그 이전 더구나 아직 만 두 돌도 안 된 소은이 같은 아기들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다.

박소은 & 유선재
각각 다른 성별을 가지고 만 21개월, 만 19개월이 된 두 아이는 요즘 만났다 하면
'싸움질'이다. 내가 굳이 이 불량스럽게 들리는 '질'이라는 글자를 붙인 까닭은 정말이지
뜯어말리지 않으면 해결책이 달리 없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이 투입되어 강제
해산시키지 않으면 두 아이의 싸움은 끝이 날 줄 몰랐고 자칫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소 닭 보듯 한 경우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에
견주면 꽤 호의적이었다. 간혹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니거나 서로 이뻐해주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어떤 특별한 사건도 없이 둘은 앙숙이 되어버렸다.

서로 잡아당기고 때리는 일은 예사고, 야무지게 떠밀기, 찐드기처럼 바지 멜빵에
매달려 괴롭히기, 과자 서로 못 먹게 하기, 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괜히 툭 때려
시비 걸기, 고함지르며 세력 과시하기, 깔고 뭉개기, 의자에 서있을 때 잡아당겨 떨어뜨리기…
태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자행되는(?) S양과 S군의 실력행사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꼭 남자아이인 선재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소은이가 먼저 시비를 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힘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땐 얼굴을 기습적으로 쥐어뜯거나 꼬집기도
해서 얼른 말리지 않으면 선재 얼굴에 상처를 낼 수도 있어서 그게 늘 걱정이다.
둘이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걸 그냥 두고 보다가 결국 어른이 나서는 때는 힘이
남아도는 선재의 막가파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이다.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른다.
내가 목격한 놀라운 장면 하나.

소은이가 옆으로 쓰러져 모로 누어있을 때다. 선재가 잽싸게 소은이에게 가서는
팔 아래 옆구리 부분 옷을 딱 두 손으로 늘어뜨려 잡더니 그대로 힘을 써 들썩하고
드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엉덩이와 다리가 공중에서 조금 떨어진
정도지만 어찌나 놀랍던지. 저 녀석이 곧 소은이를 통째로 들겠구나 싶었다.

선재는 현재 키가 소은이보다 더 크고 몸무게도 12킬로를 넘어섰다. 용가리 통뼈에
손발이 크지만 뚱뚱하진 않다. 옷 갈아 입힐 때 보았더니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여
토실한 아기 백곰 같았다. 아직 말을 잘 못하고 막무가내인 점이 괴롭지만 아주 귀엽다.
10파운드나 되는 볼링공도 번쩍 들어서 내동댕이친 적이 있으니 선재의 임꺽정 파워는
주변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하루는 선재의 '선재공격'(?)으로 S양이 밀린다 싶었는데 갑자기 소은이가 "아이 씨!"
이러는 것이었다. 참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한두 문장 입을 떼기 시작한
아기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곤 꽤나 거칠다 싶어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데 지난번에 욕실에 갇힌 소은이를 구해주었던 채구 엄마가 "소은아, '아이 씨!'가
하지 말고 '아이 참!' 그래. 알았지? 아이 차암?"하고 일러주었다. 그 후 몇 번을 아이 씨
하더니 자꾸 일러준 덕분인지 요즘은 저도 모르게 아이 씨 했다가도 곧이어 "으재아!
(선재야!) 아 탐!"하고 고쳐 말한다.

아기들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선재와 지내는('선재와 함께 논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몇 시간 동안 소은이의 "아 탐!" 소리는 이어지고, 선재 엄마와 나는
아이들이 쌈닭 같다고 입을 모았다. 눈만 마주치면 '들러붙어' 싸우니 이거야 원 탐색
시간을 갖는 쌈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또 한 번은 등받이도 없는 동그란 의자에 소은이가 뙤똑하게 서있었다. 그런데 선재가
한 번의 예고 행동도 없이, 이상한 낌새를 느낄 사이도 주지 않고 갑작스레 소은이를
확 잡아당겼다. 소은이는 그대로 방바닥에 꼿꼿하게 떨어져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나는 각각 이 두 아이의 무엇이 그토록 만나면 싸우게 하는지 참 궁금했다. 사실
어떤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상황은 의외로 적다. 물건을 가지고
싸우는 것보다 그냥 무조건, 이유없이 덤비고 시비 걸고 하는 게 보통이다. 어제 돌을
지낸 채구는 그렇게 예뻐하면서 먹을 것이나 장난감까지 곧잘 양보하는데 왜 선재는
그렇게 밉봤는지 알 수가 없다(소은이는 혼자 놀면서도 괜히 "책∼구야, 책∼구야"
하길 잘 할 정도로 채구를 참 좋아한다).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건 그렇게 악악대며 싸우는 두 아이가 나는 그냥 너무도
귀엽다는 점이다. 선재가 힘자랑을 하면서 소은이에게 세게 나간다고 해도 그냥 아기곰
같은 게 귀엽기만 하다. 단 한 번도 선재에 대해 미운 맘이 든 적이 없었다. 웬만하면
선재엄마에게도 그냥 두라고 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계속 구경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하긴 소은이의 반격도 늘 만만찮으니 싸움구경이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

싸우면서 크는 것. 그것은 어른들이 공공연히 인정하는 유쾌한 통과의례에 속한다.
다만 소은이와 선재가 오랜 시간 이렇게 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도
또 올해만 지나면 이사를 가야 하고 선재네 역시 여기서 오래 살진 않을 것이다.
같은 데서 살면서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보는 일도 올해뿐이다. 다른 곳에서 또 만난다
해도 이미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어릴 때 만나서 그렇게도 싸우며 지냈던 것을 손톱만큼도
기억 못할 것이고.

군인가족 아이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잦은 이사로 오래된 성장기 친구를 갖기
힘든 환경. 다른 학교에 전학하여 수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려움보다 오래된
어릴 적 친구를 갖기 힘들다는 점이 늘 안타깝다. 이것은 남편이 군복을 벗을 때까지
내내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차례대로 선재, 채구, 소미,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