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책읽기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 윤숙이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윤숙이와 나 우리 둘은 모두 마흔이 넘으신 어머니 몸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는 점 때문에 평소 남다른 연대감이 있었지만 윤숙이는 나와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무남독녀 외딸이었고 나는 육남매 중 막내였다. 우리는 그 많은 식구가 아버지의 봉급으로 사는 집이었고 윤숙이네 집은 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하셨다.
그러나 내가 윤숙이를 부러워했던 까닭은 한 가지였다. 그녀가 가진 근사한 그림동화전집 한 질 때문이다. 어느 출판사 책인지 누가 짓고 그린 것인지 기억에 없지만, 약 30권 정도에 제1권의 제목이 <돼지 임금님>이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일찍이 그토록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동화책을 본 적도 없고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윤숙이네 집에 가면 잘 보이는 곳에 쫙 꽂힌 그 동화전집을 늘 부러워했으면서도 빌려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거절당했을 때 민망함과 속상함도 걱정이 되었지만, 어린 마음에 나였어도 그 고운 책을 감히 집밖으로 내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에게 윤숙이의 책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책이 좋은 것은 아시지만 그렇게 나만을 위해(바로 위 언니는 벌써 중학생이었으니까) 30권이나 되는 동화책을 사줄 집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우리 집에도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하는 말만 간간이 눈치 봐서 흘렸다.
그러다가 한두 해 지나 6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엄마는 꽤 기다리신 눈치로 환하게 반기셨다.
“재잉아,(‘재형아’의 울엄니 발음) 이제 오냐. 좋은 일 있어. 오늘 엄마가 책 많이 사놨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 기뻐서 넘어질 듯 엎어질 듯 툇마루를 뛰어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방에 쌓인 적지 않은 책을 보자마자 밀려오는 실망에 목이 메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생에게 <세계문학전집> <삼국지> <루이제린저 전집> <펄벅 전집>이 다 뭐란 말인가. 그림은커녕 깨알만한 글씨가 세로로 인쇄된 책을 보니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시절도 덤핑도서가 있었던가본데, 책장수가 시골에 사는 아줌마에게 좋은 책이라며 그냥 덜컥 안겼던 모양이다. 막내딸의 책 타령이 생각나셨는데 싼 값에 이렇게 여러 가지를 준다 하니 혹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책을 어떻게 벌써 읽느냐고 투정도 해보았지만 떠돌이 책장수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 시절 끝 그 겨울방학부터 재미도 없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보봐리 부인, 여자의 일생, 마농 레스코, 춘희, 폭풍의 언덕…그리고 펄벅과 루이제린저… 나는 그 시절 엄마의 ‘높은 안목’ 덕분에 본의 아니게 세계문학을 일찌감치 읽게 되었다. 요즘 기준으론 뭐 그리 야할 것 없는 고전들이지만, 본격적인 어른들의 감성을 담은 성인물(?)은 처음이었던 터라 보봐리 부인을 비롯해서 몇몇 부분은 어린 나이에 꽤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지금, 나이보다 조금 빠르게 읽었던 문학작품이 그 이후 내 정신의 자양분이 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2)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소미는 요즘 그림책에서 저학년용 동화를 조금씩 넘나드는 책읽기 수준을 보여준다. 최근엔 <가방 들어주는 아이>와 <예담이는 열두 살에 1,000만원을 모았어요>를 보고 제 느낌을 곧잘 이야기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지난 해 여기로 이사 오기 전 글을 완전히 깨친 후, 가을부터 부쩍 혼자 책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일주일에 네 권의 그림책을 빌려주는 ‘아이북랜드’를 꾸준히 이용한 지 만 2년이 되었는데, 최근 그 덕을 제법 본다 싶은 생각에 흐뭇했다.
그런데 그 생각도 잠시, 소미는 요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있어서 조금 염려스럽다. 언니는 3월에 중학교에 올라가는 조카의 책을 때때로 정리해서 우리 집에 보내는데 거기에 지난 해 초등학생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는 이 책이 무려 15권이 있었다. 조카에게서 받은 책을 처음부터 무조건 다 내놓고 보이지는 않지만, 소미는 이 책을 검토할 사이도 없이 며칠 새 3권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림책을 중간중간 끼워 읽기도 했지만 내가 뭘 하다가 돌아보면 때마다 이 책을 손에 잡고 있었다.
“엄마, 이 책 너무너무 재밌어요. 나, 이 책 다 읽을 거예요. 그림이 오빠 정말 고맙다.”
그런데 문제는 3권에서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읽고 2권 ‘사랑과 질투’ 3권 ‘신과 요정과 인간’ 편만 오가며 들여다보는 눈치였다. 한번은 너무 재미있으니 나더러 보라고 성화였다. 특히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을 좋아하는 소미 성화에 그 책 한 권을 꼼꼼하게 보기에 이르렀다. 그런 후 결론은 ‘지금 보게 하지 말자’였다. 어제 소미와 상의해서 5권까지만 보고는 일단 모두 책을 상자에 담아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다시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양문화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만화로 만들어진 점은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어느 정도 흥미롭게 채워준다는 점은 좋았다. 그런데 그 방대한 신과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형화되었고 흥미 위주라는 점이 걸렸다. 근육질의 남자, 개미허리를 가진 눈망울이 큰 미모의 여자는 거의 모든 남자 여자에게 적용되어 캐릭터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머리모양이나 색깔, 옷차림 정도로 서로 다른 신이나 인간임을 구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2,3권에서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그림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더 도드라져 보인 것인지 모르겠으나, 거의 외모 때문에 서로 반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모양으로 그려졌다. 신과 신, 인간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의 원초적인 모습, 그리고 어른의 감성이 제법 묻어나는 것이 찜찜했다. ‘뭐 벌써부터 이런 감정을 알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만 났다. 조카가 가지고 있는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도 언제 잠시 본 적이 있는데 그 만화가 가진 교양미도 이 책에선 별로 없어보였다.
소미는 신들의 계보도 어느 정도 꿰며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고 이 책을 읽으니까 유치원에서 별자리 이야기 들을 때도 더 재미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특함을 애써 외면하면서 좋은 책이긴 한데 네가 조금 더 커서 읽었으면 좋겠다고 살살 달랬다. 아직 이 책보다 먼저 읽어야 할 좋은 그림책이 더 많다고 했다. 타협안으로 섭섭하니까 두 권만 더 읽고 그러자고 했더니 의외로 순순했다. 요즘은 소은이와 놀아도 내복을 모두 벗고 보자기와 스카프를 이용해서 여신의 옷차림을 만들어서 놀 정도인데 그 정도 양보는 나를 한시름 놓게 했다.
요즘 교육은 선행학습의 폐해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공부도 적기에 배우는 것이 좋듯, 아이들의 책도 시기마다 적당한 책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도 그 세계문학전집을 엄마가 한 3년쯤 뒤에 사주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일찌감치 한 번 읽고나니 다시 읽게 되지 않는 그 책들이, 지금은 거의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본격적인 청소년기에 읽었다면 그 자양분이란 게 지금처럼 읽은 티도 안 나게 사라지지 않고, 좀더 다른 감성으로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내가 간간이 조카의 책을 고르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완전히 읽어보지 않고 서평이나 리뷰만 의지해서 고르는 이 책이 조카와 (곧 물려 읽게 될) 소미에게 살면서 얼마나 좋은 흔적으로 남을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정녕 이 여신들을 낳았단 말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