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학교
남도에서 보낸 나흘(1)
M.미카엘라
2001. 4. 28. 10:10
참으로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여행을 함께 떠났던 사람은 모두
여덟 명. 우리 네 식구 외에 친정 언니와 초등학교 4학년 조카 그림이, 그리고 우리 집
옆에 사는 이웃 결혼 1년 차 Y씨(남편) 부부(아내는 S씨). 멤버가 아주 다양하게
짜였지만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 크게 걱정을 안 했다.
예전에 어디 한번 놀러가려면 빙 둘러앉아 머리 맞대고 누구는 쌀을 가져오고 누구는
밑반찬을 해오고 했던 식으로, 우리의 이번 여행도 그런 잔재미를 느끼는 데서 출발했다.
주로 언니와 내가 이리 왈 저리 왈 계획을 세우는 형편이었지만 여행계획서를 만들자
모두 한 번 보자고 난리였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준비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한 계획서였다. 한 끼
사먹는 밥값이 만만찮아 되도록 숙소에서 점심도 준비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쌀, 김치는
물론이고 집에 잰 김, 깻잎, 과일, 과자, 빵, 음료수, 맥주, 라면, 햇반, 휴게소에서 마실
커피까지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언니가 큰 유통점에서 구입하거나 내가 PX를 이용해
마련했다. 아이스박스가 꽉 차고 다시 두 대의 자동차 트렁크가 꽉 찼다.
회비는 각 가정마다 10만원, 그 외에 차를 안 가져가는 우리 집이 3일의 숙박비를
책임지고 언니와 Y씨네는 자동차 기름값과 고속도로비를 부담하기로 가볍게 합의했다.
화순에 있는 한 민간 콘도를 이틀 간 빌리고(십수 개의 객실이 군 휴양소로 지정되어
있어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행 첫날만 여수의 일반 숙박업소에 묵기로 했다.
여수, 순천, 화순 이렇게 남도의 세 고장을 훑는 이번 여행지를 향한 내 마음은 여행
준비를 하는 그 순간부터 멀리 내달리고 있었다. 화순군 보성읍의 차밭을 가려는 내
오랜 꿈은 일 년 전에도 한 번 무참히 깨어진 일이 있는지라(칼럼 제22호를 참고하시길)
이번 여행지의 하이라이트로 꼽고는 마음이 한껏 설렜다.
21일 토요일 첫날은 일단 오후에 출발하게 되니 여수까지 도착해서 자는 것만으로
일정을 잡았다. 웨딩매니저로 일하는 S씨를 기다리느라 생각보다 두 시간 늦은 저녁
일곱 시에 출발했다. 아예 저녁을 먹고 완주의 여산 휴게소에서 쉬자 약속하고 골고루
나누어 탔다. 요즘 도통 걸으려고 하지 않는 소미에겐 며칠 전부터 미리 여행은 든든히
먹고 즐겁게 많이 걸으며 보고 배우는 것이라 일러두었다. 조금 피곤해도 짜증내지
않고 참을 수도 있어야한다고 한참을 부탁했다.
휴게소에서 쉰 것 빼고 5시간만에 도착한 여수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시간은 밤
1시를 넘기고 우리는 돌산도 그 끝 언저리에서 더듬더듬 어렵사리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다. 민박집이라도 침대가 있으니까 방바닥은 콧구멍 만했다. 그러나 우리는 방 한
칸만 얻었다. 우리 집과 Y씨네는 아주 절친한 사이라 크게 불편함이 없었고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다닌 언니와 조카도 이 정도쯤은 감수했다. 예닐곱 시간 잠만 잘 방이니
3만원도 아깝다 하며 서로 불편한 대로 칼잠을 잤다.
그러나 너무 추웠다. 거실 하나 두고 방이 세 개였는데 우리 방이 여간해서 따뜻할
기미가 없었다. 소미와 소은이도 추운지 이불에 폭 싸여 눈만 땡글거리며 꼼짝을 안
했다. 보일러 밸브를 보니 두어 개가 잠겨있었다. 잠긴 게 우리 방인가 보다고 입을
모으며 잠긴 밸브를 모두 열어버렸다. 주인을 오라 가라 하기가 뭣한 늦은 밤이었다.
두 시를 한참 넘긴 후 우린 잠들었다.
22일 휴일 아침, 남해를 코앞에 둔 이 고장 아침은 6시 반쯤인데도 우리 동네 8시쯤처럼
밝았다. 내가 먼저 일어나 방 한 면을 차지하는 통유리를 가린 버티칼 사이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의 민박집은 높은 지대에 있었고
그대로 바다와 작은 어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벌써 그물 손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드문드문 노란 유채꽃이 가득 피어서 너무 아름다웠다.
모두 깨워서 밖을 내다 보라 했더니 남편은 일출을 보려고 더 일찍 일어났었다고
했다. 여기선 잘 안보이더라고 덧붙였다. 정말 피곤한 몸들이었지만 창밖 풍경에 생각보다
잠을 털어내기 쉬웠고 빨리 생기를 되찾았다. 여행은 늘 볼 수 없는 이런 풍경 하나만으로도
일상에 지친 사람을 크게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후다다닥 차례차례 씻고 간단히 쨈 바른 식빵에 우유로 아침을 먹자, 그리고 점심은
이번 여행 중 최고급으로 먹고 힘내자 했다. 내가 우유를 가지러 차 트렁크를 향하는데
민박집 아주머니가 대단히 흥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리가 큰일을 내고 만 것이다.
보일러를 다 열어서 방방마다 뜨끈하게 해놓으면 어쩌느냐는 말이었다.
"어찌해얐으면 좋겄소. 내가 방 두 개 하라니께 굳이 하나만 헌다고 혀놓고 하나 값시로
세 개, 네 개 쓴 꼴이니 내가 분통이 안 터지요? 어찌되얐건 아자씨 좀 보자고 하씨요."
내가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늦은 시간이라 아주머니 오시라 가시라 하기 죄송했다고
했고, 아이들과 너무 추워서 그랬다고 불쌍하게 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모든 회비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굳이 아자씨(남자)와 상대하시겠다는 말에 쿡쿡 웃음도 났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아주머니를 어떤 말로 풀어드릴까 온갖 묘안도 짰지만 서로 네가 해결하라느니 하면서
두려워했다. 결국 정 뭣하면 2만원 정도 주자고 의논했지만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였다.
아예 애초에 3만원 더 주고 방 하나를 더 빌렸으면 이보다 나을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기분 좋게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끝으로
방을 나왔을 땐 이미 화해 무드로 접어들었다. Y씨와 S씨, 그리고 남편 이 세 사람이
죄송하다 백배사죄하며 아주머니의 온갖 푸념을 달게 들어드리니 풀어진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자기들이 군인이다, 휴가차 가족들과 왔다, 어쩌면 이 근방에서 근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꼭 다시 찾아 뵙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겠다, 여기 전망이
너무 좋다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거길 떠나면서 남편은 어디 스포츠 신문에서라도
본 것인지 오늘 자기 일진에 횡재수가 있다고 했다면서 2만원이 굳은 게 그건가 보다해서
우린 모두 눈을 맞추고 낄낄댔다.
우린 향일함을 향했다. 해안도로를 타고 밤에 느낄 수 없었던 풍경들을 손에 잡을 듯
곁에 두고 달려서 향일암엔 금방 닿았다. 꽤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는데 생각보다
소미가 잘 올라주어서 나는 이번 여행을 좋게 예감했다. 반대로 높은 곳에만 오르면
오금을 못 펴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조카 그림이는 벌벌 떨다, 징징대다 하면서 억지로
올랐다. 향일암에 올라서는 바다쪽으로 서는 건 엄두도 못 내고 대웅전 옆 한켠에 서
있기만 했다.
가슴이 탁 트였다. 새해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딛을 틈이 없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날은 꽤 한산했다. 들어가고 나온 해안선과 바다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남해를
바라보면 늘 탄성을 아낄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여행지로 동해안을 선호하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남해, 점점이 흩어진 섬들, 그 아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지 못하고 무조건 동해, 설악권만 죽어라 가는 건
아닌지.
향일암 둘레둘레 핀 동백은 이미 뚝뚝 많이 지기도 했지만 그 빛깔이 여전히 아름답고
햇빛이 너무 좋아 바다는 한없이 빛났다. 소미도 소은이도 싱글벙글 즐거웠다. 발랄한
새댁 S씨 역시 너무 즐거워했다. 붙임성이 좋아서 나나 거의 처음 본 언니에게도
아주 싹싹하고 스스럼 없어서 예쁜데 내게 하는 말이 아주 압권이었다.
"언니, 너무 좋다. 근데 언니, 왜 나한테 바다에 간단 말은 안 했어?"
"아휴, 여수 간다고 했으면 바다 보는 건 당연한 거지. 오동도, 돌산도 같은 섬이
있으면 바다가 있는 거고. 꼭 말해줘야 아나 뭐?"
"난 몰랐어."
Y씨 부부는 동해를 포함한 강원도권 여행지 외에는 다른 고장 땅이 너무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더더욱 전라도 땅은 외국만큼이나 낯선 것 같았다.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어려도 여행을 다니고 하는 일을 해보지 않아서 이번 길떠남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동백꽃도 처음 보고 처음 알았단다. 나는 이런 Y씨 부부가 더 신기하고 귀여웠다.
향일암을 오를 때도 보았지만 진입로엔 돌산 갓김치를 파는 곳이 아주 많았다. 해산물이나
건어물보다 더욱 유명한 돌산의 갓. 갓을 단으로 묶어 파는 곳, 김치를 직접 담아 파는
곳이 주욱 늘어섰다. Y씨와 남편은 연신 여러 집 갓김치를 짠 줄도 모르고 맛보았다.
한 집 김치를 낙찰보고 3Kg들이 한 상자를 샀다. 이 김치는 3일 내내 우리들의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김치 안 샀으면 밥을 뭐하고 먹었을까 싶다.
뜨거운 쌀밥 위에 척척 놓아서 먹자면 봄타는 사람의 입맛을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다.
오동도를 보러 나오는 길에 유채꽃밭을 조성해놓은 곳에서 사진을 찍고 그 앞 수산종합관에
들렀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다. 소은이는 큰 물고기 박제를 보고 "무쩌워! 무쩌워!"
하면서도 못내 재미있고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산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림이는 이틀씩이나 학교 빠지고 따라 나선 길이니 많이 보고 느끼고 학교에 가라고 했다.
오동도를 보는 일은 어려웠다. 유명세를 타는지 휴일 한낮에 오동도 가는 길은 이만저만
아니게 꽉 막혔다. 우리는 계획을 바꿨다. 아침이 부실했으니 얼른 밥부터 먹고 바로
순천으로 나가자고. 여기서 오동도 한 번 보겠다고 버티다간 너무 힘들어질 듯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숙소가 있는 화순적벽 부근까지 갈 거리가 적지 않았다.
남편의 부대 사람 중 여수가 고향인 사람의 정보제공으로 잘한다는 한정식 집에서
사치스런(?) 점심을 먹었다. 한정식이라기보다 회정식, 해산물 정식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대부분 바다에서 난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바다가재 요리부터 성게알, 산낙지까지
조금 조금 없는 게 없이 몇 차례 계속 나왔다. 해산물 요리 좋아하는 남편과 나만 좀
신난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미안했다.
배부르게 한 상 먹고 우리 일행은 순천의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조선시대 마을이라고 하는데 예상대로 관리는 영 허술했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낙안읍성 모두 고즈넉한 전통문화와 그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마을이지만 온갖 상점과
소음은 그것들을 한순간에 빼앗는다.
<짚풀공예>라고 쓰인 팻말이 달린 한 초가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초라한 한 노인만 문 열어놓은 방안에서 짚으로 새끼를 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안을 호기심 어리게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민망하고 안쓰럽고 속이 상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안내판만 근사했지 눈 가리고 아웅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노인은
담배값이라도 쥐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일까. 너무 쓸쓸하고 가엾은 느낌까지
들었다. 우리 나라는 훌륭한 문화재가 없는 게 아니라 관리와 보존이 늘 문제다.
성곽에 올라서서 산책하듯 주욱 걷다보니 민속마을 전경이 쓰윽 한눈에 들어와 좀
즐거웠다. 잠을 흡족하게 못 잔 소미는 내내 얼굴을 안 펴고 유모차만 타고 있고,
언제든 얼마를 잤든 늘 우는 법 없이 밝은 얼굴인 소은이는 나를 한결 수월하게 했다.
참, 둘이 너무나도 다르게 여행 내내 나를 놀라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고 힘이 나게도 했다.
고인돌 공원이 가깝게 있었지만 밤새 달려와 지난 밤 잠도 설친 우리들은 내일 가보자
하고는 바로 화순에 있는 콘도로 향했다.
*사진 순서대로
1. 향일암 가는 길에서 Y씨와 S씨.
2. 유채꽃 단지에서 자매.
3.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그림이 오빠와 소은이.
4. 곤장. 실감나는 표정.
5. 아, 피곤해.





여덟 명. 우리 네 식구 외에 친정 언니와 초등학교 4학년 조카 그림이, 그리고 우리 집
옆에 사는 이웃 결혼 1년 차 Y씨(남편) 부부(아내는 S씨). 멤버가 아주 다양하게
짜였지만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 크게 걱정을 안 했다.
예전에 어디 한번 놀러가려면 빙 둘러앉아 머리 맞대고 누구는 쌀을 가져오고 누구는
밑반찬을 해오고 했던 식으로, 우리의 이번 여행도 그런 잔재미를 느끼는 데서 출발했다.
주로 언니와 내가 이리 왈 저리 왈 계획을 세우는 형편이었지만 여행계획서를 만들자
모두 한 번 보자고 난리였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준비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한 계획서였다. 한 끼
사먹는 밥값이 만만찮아 되도록 숙소에서 점심도 준비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쌀, 김치는
물론이고 집에 잰 김, 깻잎, 과일, 과자, 빵, 음료수, 맥주, 라면, 햇반, 휴게소에서 마실
커피까지 준비했다. 이 모든 것은 언니가 큰 유통점에서 구입하거나 내가 PX를 이용해
마련했다. 아이스박스가 꽉 차고 다시 두 대의 자동차 트렁크가 꽉 찼다.
회비는 각 가정마다 10만원, 그 외에 차를 안 가져가는 우리 집이 3일의 숙박비를
책임지고 언니와 Y씨네는 자동차 기름값과 고속도로비를 부담하기로 가볍게 합의했다.
화순에 있는 한 민간 콘도를 이틀 간 빌리고(십수 개의 객실이 군 휴양소로 지정되어
있어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행 첫날만 여수의 일반 숙박업소에 묵기로 했다.
여수, 순천, 화순 이렇게 남도의 세 고장을 훑는 이번 여행지를 향한 내 마음은 여행
준비를 하는 그 순간부터 멀리 내달리고 있었다. 화순군 보성읍의 차밭을 가려는 내
오랜 꿈은 일 년 전에도 한 번 무참히 깨어진 일이 있는지라(칼럼 제22호를 참고하시길)
이번 여행지의 하이라이트로 꼽고는 마음이 한껏 설렜다.
21일 토요일 첫날은 일단 오후에 출발하게 되니 여수까지 도착해서 자는 것만으로
일정을 잡았다. 웨딩매니저로 일하는 S씨를 기다리느라 생각보다 두 시간 늦은 저녁
일곱 시에 출발했다. 아예 저녁을 먹고 완주의 여산 휴게소에서 쉬자 약속하고 골고루
나누어 탔다. 요즘 도통 걸으려고 하지 않는 소미에겐 며칠 전부터 미리 여행은 든든히
먹고 즐겁게 많이 걸으며 보고 배우는 것이라 일러두었다. 조금 피곤해도 짜증내지
않고 참을 수도 있어야한다고 한참을 부탁했다.
휴게소에서 쉰 것 빼고 5시간만에 도착한 여수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시간은 밤
1시를 넘기고 우리는 돌산도 그 끝 언저리에서 더듬더듬 어렵사리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다. 민박집이라도 침대가 있으니까 방바닥은 콧구멍 만했다. 그러나 우리는 방 한
칸만 얻었다. 우리 집과 Y씨네는 아주 절친한 사이라 크게 불편함이 없었고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다닌 언니와 조카도 이 정도쯤은 감수했다. 예닐곱 시간 잠만 잘 방이니
3만원도 아깝다 하며 서로 불편한 대로 칼잠을 잤다.
그러나 너무 추웠다. 거실 하나 두고 방이 세 개였는데 우리 방이 여간해서 따뜻할
기미가 없었다. 소미와 소은이도 추운지 이불에 폭 싸여 눈만 땡글거리며 꼼짝을 안
했다. 보일러 밸브를 보니 두어 개가 잠겨있었다. 잠긴 게 우리 방인가 보다고 입을
모으며 잠긴 밸브를 모두 열어버렸다. 주인을 오라 가라 하기가 뭣한 늦은 밤이었다.
두 시를 한참 넘긴 후 우린 잠들었다.
22일 휴일 아침, 남해를 코앞에 둔 이 고장 아침은 6시 반쯤인데도 우리 동네 8시쯤처럼
밝았다. 내가 먼저 일어나 방 한 면을 차지하는 통유리를 가린 버티칼 사이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의 민박집은 높은 지대에 있었고
그대로 바다와 작은 어촌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벌써 그물 손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드문드문 노란 유채꽃이 가득 피어서 너무 아름다웠다.
모두 깨워서 밖을 내다 보라 했더니 남편은 일출을 보려고 더 일찍 일어났었다고
했다. 여기선 잘 안보이더라고 덧붙였다. 정말 피곤한 몸들이었지만 창밖 풍경에 생각보다
잠을 털어내기 쉬웠고 빨리 생기를 되찾았다. 여행은 늘 볼 수 없는 이런 풍경 하나만으로도
일상에 지친 사람을 크게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후다다닥 차례차례 씻고 간단히 쨈 바른 식빵에 우유로 아침을 먹자, 그리고 점심은
이번 여행 중 최고급으로 먹고 힘내자 했다. 내가 우유를 가지러 차 트렁크를 향하는데
민박집 아주머니가 대단히 흥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리가 큰일을 내고 만 것이다.
보일러를 다 열어서 방방마다 뜨끈하게 해놓으면 어쩌느냐는 말이었다.
"어찌해얐으면 좋겄소. 내가 방 두 개 하라니께 굳이 하나만 헌다고 혀놓고 하나 값시로
세 개, 네 개 쓴 꼴이니 내가 분통이 안 터지요? 어찌되얐건 아자씨 좀 보자고 하씨요."
내가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늦은 시간이라 아주머니 오시라 가시라 하기 죄송했다고
했고, 아이들과 너무 추워서 그랬다고 불쌍하게 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모든 회비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굳이 아자씨(남자)와 상대하시겠다는 말에 쿡쿡 웃음도 났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아주머니를 어떤 말로 풀어드릴까 온갖 묘안도 짰지만 서로 네가 해결하라느니 하면서
두려워했다. 결국 정 뭣하면 2만원 정도 주자고 의논했지만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였다.
아예 애초에 3만원 더 주고 방 하나를 더 빌렸으면 이보다 나을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기분 좋게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끝으로
방을 나왔을 땐 이미 화해 무드로 접어들었다. Y씨와 S씨, 그리고 남편 이 세 사람이
죄송하다 백배사죄하며 아주머니의 온갖 푸념을 달게 들어드리니 풀어진 모양이었다.
남자들은 자기들이 군인이다, 휴가차 가족들과 왔다, 어쩌면 이 근방에서 근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꼭 다시 찾아 뵙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겠다, 여기 전망이
너무 좋다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거길 떠나면서 남편은 어디 스포츠 신문에서라도
본 것인지 오늘 자기 일진에 횡재수가 있다고 했다면서 2만원이 굳은 게 그건가 보다해서
우린 모두 눈을 맞추고 낄낄댔다.
우린 향일함을 향했다. 해안도로를 타고 밤에 느낄 수 없었던 풍경들을 손에 잡을 듯
곁에 두고 달려서 향일암엔 금방 닿았다. 꽤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는데 생각보다
소미가 잘 올라주어서 나는 이번 여행을 좋게 예감했다. 반대로 높은 곳에만 오르면
오금을 못 펴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조카 그림이는 벌벌 떨다, 징징대다 하면서 억지로
올랐다. 향일암에 올라서는 바다쪽으로 서는 건 엄두도 못 내고 대웅전 옆 한켠에 서
있기만 했다.
가슴이 탁 트였다. 새해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딛을 틈이 없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날은 꽤 한산했다. 들어가고 나온 해안선과 바다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남해를
바라보면 늘 탄성을 아낄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여행지로 동해안을 선호하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남해, 점점이 흩어진 섬들, 그 아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암자를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함을 느껴보지 못하고 무조건 동해, 설악권만 죽어라 가는 건
아닌지.
향일암 둘레둘레 핀 동백은 이미 뚝뚝 많이 지기도 했지만 그 빛깔이 여전히 아름답고
햇빛이 너무 좋아 바다는 한없이 빛났다. 소미도 소은이도 싱글벙글 즐거웠다. 발랄한
새댁 S씨 역시 너무 즐거워했다. 붙임성이 좋아서 나나 거의 처음 본 언니에게도
아주 싹싹하고 스스럼 없어서 예쁜데 내게 하는 말이 아주 압권이었다.
"언니, 너무 좋다. 근데 언니, 왜 나한테 바다에 간단 말은 안 했어?"
"아휴, 여수 간다고 했으면 바다 보는 건 당연한 거지. 오동도, 돌산도 같은 섬이
있으면 바다가 있는 거고. 꼭 말해줘야 아나 뭐?"
"난 몰랐어."
Y씨 부부는 동해를 포함한 강원도권 여행지 외에는 다른 고장 땅이 너무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더더욱 전라도 땅은 외국만큼이나 낯선 것 같았다.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어려도 여행을 다니고 하는 일을 해보지 않아서 이번 길떠남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동백꽃도 처음 보고 처음 알았단다. 나는 이런 Y씨 부부가 더 신기하고 귀여웠다.
향일암을 오를 때도 보았지만 진입로엔 돌산 갓김치를 파는 곳이 아주 많았다. 해산물이나
건어물보다 더욱 유명한 돌산의 갓. 갓을 단으로 묶어 파는 곳, 김치를 직접 담아 파는
곳이 주욱 늘어섰다. Y씨와 남편은 연신 여러 집 갓김치를 짠 줄도 모르고 맛보았다.
한 집 김치를 낙찰보고 3Kg들이 한 상자를 샀다. 이 김치는 3일 내내 우리들의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김치 안 샀으면 밥을 뭐하고 먹었을까 싶다.
뜨거운 쌀밥 위에 척척 놓아서 먹자면 봄타는 사람의 입맛을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다.
오동도를 보러 나오는 길에 유채꽃밭을 조성해놓은 곳에서 사진을 찍고 그 앞 수산종합관에
들렀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다. 소은이는 큰 물고기 박제를 보고 "무쩌워! 무쩌워!"
하면서도 못내 재미있고 신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산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림이는 이틀씩이나 학교 빠지고 따라 나선 길이니 많이 보고 느끼고 학교에 가라고 했다.
오동도를 보는 일은 어려웠다. 유명세를 타는지 휴일 한낮에 오동도 가는 길은 이만저만
아니게 꽉 막혔다. 우리는 계획을 바꿨다. 아침이 부실했으니 얼른 밥부터 먹고 바로
순천으로 나가자고. 여기서 오동도 한 번 보겠다고 버티다간 너무 힘들어질 듯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숙소가 있는 화순적벽 부근까지 갈 거리가 적지 않았다.
남편의 부대 사람 중 여수가 고향인 사람의 정보제공으로 잘한다는 한정식 집에서
사치스런(?) 점심을 먹었다. 한정식이라기보다 회정식, 해산물 정식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대부분 바다에서 난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바다가재 요리부터 성게알, 산낙지까지
조금 조금 없는 게 없이 몇 차례 계속 나왔다. 해산물 요리 좋아하는 남편과 나만 좀
신난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미안했다.
배부르게 한 상 먹고 우리 일행은 순천의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조선시대 마을이라고 하는데 예상대로 관리는 영 허술했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낙안읍성 모두 고즈넉한 전통문화와 그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마을이지만 온갖 상점과
소음은 그것들을 한순간에 빼앗는다.
<짚풀공예>라고 쓰인 팻말이 달린 한 초가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초라한 한 노인만 문 열어놓은 방안에서 짚으로 새끼를 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안을 호기심 어리게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민망하고 안쓰럽고 속이 상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안내판만 근사했지 눈 가리고 아웅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노인은
담배값이라도 쥐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일까. 너무 쓸쓸하고 가엾은 느낌까지
들었다. 우리 나라는 훌륭한 문화재가 없는 게 아니라 관리와 보존이 늘 문제다.
성곽에 올라서서 산책하듯 주욱 걷다보니 민속마을 전경이 쓰윽 한눈에 들어와 좀
즐거웠다. 잠을 흡족하게 못 잔 소미는 내내 얼굴을 안 펴고 유모차만 타고 있고,
언제든 얼마를 잤든 늘 우는 법 없이 밝은 얼굴인 소은이는 나를 한결 수월하게 했다.
참, 둘이 너무나도 다르게 여행 내내 나를 놀라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고 힘이 나게도 했다.
고인돌 공원이 가깝게 있었지만 밤새 달려와 지난 밤 잠도 설친 우리들은 내일 가보자
하고는 바로 화순에 있는 콘도로 향했다.
*사진 순서대로
1. 향일암 가는 길에서 Y씨와 S씨.
2. 유채꽃 단지에서 자매.
3.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그림이 오빠와 소은이.
4. 곤장. 실감나는 표정.
5. 아, 피곤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