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산타는 정말 있을까

M.미카엘라 2005. 12. 20. 16:56

해마다 이맘때쯤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궁금증 하나. 산타할아버지는 정말 있을까? 아이들의 솜사탕 같은 꿈을 되도록 오래 간직해주고 싶은 부모들은 갖은 스토리를 만들고 짜내 ‘세상이 다 아는 산타의 실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이제까지는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아도 아직 산타 할아버지가 허연 수염을 훨훨 날리며 밤에 오시는 줄 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엄마는 이제쯤 아이들이 산타의 실체를 환히 알게 되어서 선물의 이중부담에서 헤어 나오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만, 산통 깨는 일을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우리 이웃의 한 엄마는 작년에 이미 두 아이들에게 산타의 실체를 알려주고 기대를 접게 하였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건 못하겠다.


 며칠 전에 소미소은이하고 문구점엘 갔다. 남편이 새 부대에 첫 출근하기 전날, 가벼운 송별의 의미로 밖에서 외식을 하고 그 앞에 있던 제법 큰 문구점에 가서 책받침하고 독서록 공책을 사자고 했다. 그런데 어른이나 아이나 견물생심이라, 제법 큰 문구점에는 아이들이 눈만 돌리면 갖고 싶은 게 천지였다.


역시나 우리의 소은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책받침과 독서록 생각은 아예 내던져놓은 채 잿밥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 이눔의 아바타 스티커들은 한동안 그렇게 아바타북에 다닥다닥 붙여 끌고 다니게 만들어 놓더니만 이젠 아바타 가방이 나왔다. 크기는 아바타북이나 별로 차이가 없지만 손잡이가 앙증맞게 달려서 딱 소은이 취향이다. 이게 5천원이다. 그걸 딱 잡더니 내게 구애의 눈길을 보내며 끈질긴 장정의 첫 발을 내딛는다.(아, 나 좀 살리도~)


이러기 시작하면 그 긴 장정이 언제 끝날 줄 모르고 난 미리부터 피곤해서 빨리 방법을 달리해 주위를 환기시켜야했다. 집에 아바타 수첩에, 아바타 책에, 양말에 뭐가 거치적거려서  보면 아바타들의 스타킹, 바지, 치마들이 들러붙어 성가시게 하는 판인데, 갖고 싶은 그 맘 알지만 너무 돈이 아깝다. 소미 역시 집에 필통을 서너 개나 켜켜이 쌓아두고 딱 보들보들 강아지 모습 그대로를 가진 예쁜 필통을 들고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가 머리 굴려 제안을 했다. 그래도 좋다면 사주려고 했다.


“얘들아, 그럼 엄마가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줄까? 그럼 되지? 여기서 오늘 해결하자. 다 풀어서 미리 해버리면 기분도 안 나고 재미없으니까 엄마가 포장해서 잘 두었다가 성탄미사하고 와서 줄게.”

아이들의 표정은 싹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이걸루? 이건 아닌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 전략이 대략 성공이구나 싶어 속으로 파안대소하고 추이를 지켜봤다.

“산타 할아버지는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시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원하는 걸 다 맞춰서 주시기는 어려워. 그러니까 진짜 갖고 싶은 건 엄마아빠한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거 갖고 싶어? 그럼 이거 사줄게.”


둘 다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놓더니 다시 분주해졌다. 아하, 너희도 그건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인 것이 분명하구나 싶은 게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결국 소은이는 어린이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 인형을 골랐고 소미는 갖고 싶은 게 거기 없어서 나중에 찾기로 했다. 가볍게 책받침과 독서록을 함께 사들고 나오면서, 이 선물은 크리스마스 날 뜯어보자 하고 일단 내가 포장해서 보관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의 큰 즐거움이 미리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이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거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은이가 말했다.

“난 정말 한 달에 한번씩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소미가 말했다.

“안돼 그럼. 산타 할아버지 돈 많이 들어서.”

“아냐, 돌아가면서 한 할아버지씩 하면 되잖아.”

“혼자 하시면 얼마나 힘들겠냐?”

나랑 남편은 킬킬 웃었다. 귀여운 것들. 내 어찌 세상이 다 아는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폭로할 수 있겠나. 그런데 소미가 우려했던 부분의 첫 질문을 시작했다.


“근데 아빠, 산타 할아버지는 그럼 하느님이 시켜서 아르바이트 하시는 거예요?”

아빠한테 물었으니 아빠한테 들어라 하고 난 잠자코 있었다.

“아냐,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기쁜 날이니까 어린이들에게 선물 주시는 거야.”

“근데 아빠, 정말 산타 할아버지가 있어요? 우리 반 애들은 자꾸만 산타 할아버지가 없대요.”

“그럼, 소미는 하느님 계시다고 믿어?”

“네, 믿어요.”

“소미는 하느님 본 적 있어? 없지? 그런데 하느님은 어떻게 믿을 수 있어?”

“……”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는 게 아냐 소미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으로 보면 믿을 수 있는 거야. 소미가 하느님을 보지 않았지만 마음에서 믿는 것처럼.”


아하, 참 좋은 말이다 싶었다. 평소 그래도 아이들이 하는 질문에 성의껏 아이들 눈높이에서 대답해주는 노력 덕분인지 별로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한번 더 거들었다.

“소미야, 산타 할아버지는 믿지 않는 아이들에겐 더 이상 오시지 않아. 아빠엄마가 선물해주는 거라고 하는 생각하는 애들은 이미 산타 할아버지가 진짜 안 오시기 때문에 아빠 엄마가 선물해주는 거야.”


소미는 그 다음부터 대답이 없었다. 생각 중인 것 같기도 하고, 잠시 산타할아버지를 의심했던 마음에 슬쩍 불안감이 끼어든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좀 미안했다. 그런데 그 틈을 타 다시 소은이가 끼어들었다.

“난 이번 크리스마스 되는 날 밤엔 안 잘 거야. 꼭 산타 할아버지 볼 거야.”

“그럼 안돼. 그럼 아마 할아버지 안 오실 걸.”

내가 대답했더니 그때 소미가 말했다.

“맞아 소은아. 그건 할아버지가 진짜 오나 안 오나 하는 거니까 의심하는 거야.”

“아냐, 나 의심 안 해. 의심해서 그러는 아냐. 그냥 산타 할아버지가 보고 싶으니깐 그렇지. 두 눈 똑바루 뜨고 만날 거야 이번엔.”


두 아이의 공방을 지켜보면서 나의 어린시절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언니는 폼 나는 양말에 담긴 사탕이며 초콜릿을 기억하지만 난 사실 거기까지 기억은 없다. 다만 멋진 전나무도 아닌 울타리로 쳐진 키 큰 노간주나무를 꾸미느라 낑낑대던 언니 오빠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 아련하다. 그때야 불이 반짝이는 전구는 사치에 가깝고 빨강, 파랑, 은색, 금색 반짝이 술을 치고 이불 한 귀퉁이에서 빼낸 것 같은 솜을 듬성듬성 얹은 게 전부였다. 오빠들이 좀 크고 나서 전기며 뭐며 좀 만진다 할 때쯤 전구를 어디서 사다가 장식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쟁이’들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를 지금도 기억나게 해주신 배경엔 미군부대 노무자라는 아버지의 직업이 한몫을 했던 듯싶다. 늘 도시락을 싸들고 아침 7시 버스를 타고 출근하셨던 아버지는 거기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겨울철에 이불 속에서 먹던 오리지날 데이트 아이스크림, ‘선키스트’가 선명하게 찍힌 오렌지, 커다란 야전점퍼 주머니에 한두 개씩 넣어가지고 오셨던 바나나, 땅콩*아몬드*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가 짭짤하게 들어있던 깡통, 그 시골에서 아버지 덕분에 그런 것도 맛보며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미군부대밥을 평생 드셔놓고도 아버지가 엄격하게 금지하시던 일이 있었으니, 학교 오가면서 미군들의 탱크나 트럭에 대고 ‘할로 짬! 기브 미 껌’ 이런 구걸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게 발각되거나 밀고 되면 아버지한테 갈 것도 없이 엄마한테 우린 그날로 죽음이다. 그런 일로 고초를 겪은 경험이 없고 형제들이 모두 잘 살아있는 거 보면 오빠 언니들도 명심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애들이 다 ‘할로 짬! 기브 미 쪼꼬렛!’ 그러면서 미군 차 꽁무니를 쫓아가도 나는 아예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큰 군용비행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올 때 혹 훈련 중인 군인들이 있으면 아이들은 더 신나하며 다가갔지만 나는 차라리 에둘러 먼 길로 돌아오곤 했다. 언젠가 이런 추억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 솔직히 친구들과 같이 가고 싶지 않았느냐 질문도 받았지만, 언감생심(오늘 참 육두문자... 아니, 사자성어 많이 나온다) 아예 그런 일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려니 하니 욕망도 생기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노간주나무의 뻘쭘한 트리가 떠오르고, 이어서 굴비 한 두릅 엮듯 그렇게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가정교육이 상반되게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아버지의 이중성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산타 할아버지의 실체는 일찌감치 알았던 것 같고 하루 종일 만화영화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산타 이야기를 즐겁게 볼 수 있어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던 같다.


산타의 환상이 깨어진들 아이들이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내 아이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다음에 해맑게 자신의 아이들에게 산타스토리를 엮어낼 것이다. 소미가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결정적으로 산타는 있다고 생각한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남편과 나는 속으론 낄낄, 겉으론 흐뭇하게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내 속은 사실 쪼끔 쓰리다.


“소은아, 생각해봐. 산타 할아버지는 계셔. 우리 엄마가 선물을 두 개씩이나 함부로 사실 분이니? 엄마아빠도 선물 해주시는데 산타 할아버지 선물까지 사신다고? 말도 안돼.”

“맞아. 우리 엄마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