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질문

M.미카엘라 2001. 6. 6. 15:35
아이에게 하는 질문 중 어떤 것이 가장 바보 같고 가혹하고 곤혹스럽고 나쁠까? 칼럼
초장부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일단 답은 아주 쉽다.
"○○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구나 어릴 때 한번쯤 받아보았을 질문이다. 나 역시 어릴 때 숱하게 받았다. 그것도
우리 부모님은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는데 좀 큰 언니나 오빠, 이웃 아줌마, 아저씨들이
심심하면 물었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 다. 엄마 아버지 똑같이 좋아."

그 당시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이 대답 말고 다른 대답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느 한
사람을 고른다는 일이 곧 '배신이고 배반처럼' 느껴져 감히 간단하게 "엄마" 아니면
"아빠"하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게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도의적인
예(어른이 되고 나니 이런 똑떨어지는 표현이 가능하군)라고 어린 맘에도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은 얼마나 곤란하고 곤혹스러운가. 그것도 부모님 두 분이
한 자리에 계시는데 그런 질문을 던져놓고, 내가 위에서처럼 한결같이 대답하면 "에이,
정말 솔직하게 말해 봐. 그래도 쪼끔이라도 누가 더 좋아?"하며 집요하게 파고들 땐
그만 딱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후후! 그런데 요즘 소은이가 이 비슷한 질문 속에 시달리고 있다. 엄마와 아빠를 두고
고르는 문제는 아니지만 누굴 더 좋아하느냐 하는 것은 같으니 결국 같은 유형의 질문이다.
엄마, 아빠 고르는 문제보다 이웃에 사는 삼촌이나 이모들의 은근한 강요와 압박의 눈길
때문에 더욱 힘이 드니 어떤 때는 참 측은할 때가 있을 정도다.

그 중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시지 모모'. 본래는 '수정이 이모'인데
소은이가 발음이 안 되어 그렇게 부르다 보니 어른들도 간혹 소은이처럼 부르는 걸 즐기는
데까지 왔다. 수정씨는 아직 아기가 없는 데다 한창 재롱이 많은 소은이를 무척이나 예뻐한다.
소은이 같은 딸을 꼭 낳고 싶다고 몇 번 말을 했으며 같이 식사를 하거나 어디를 가면 소은이를
살뜰히 챙겨주니 내가 한 어려움을 덜 때가 많다.

"소은아, 용이 삼촌이 좋아? 시지모모가 좋아?"
이럴 때 아이들은 보통 뒤쪽을 선택하는 것이 거의 정석이다. 정말 그런가 보기 위해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실험한 예도 텔레비전에서도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의 모두가
후자를 고르는 것을 보고 나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한 기억이 난다. 그 까닭을 어떤 아동심리
학자가 나와 이야기했는데 그건 다 잊었다.

암튼 소은이 역시 처음엔 "시지모모가 좋아? 용이 삼촌이 좋아?"하는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
뒤에 것을 골라서 "요이 사춘"했었다. 이걸 '시지모모'는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기어이
세뇌를 시켜 아무리 여러 번 이렇게 저렇게 바꿔서 물어보아도 '시지모모'를 간택(?)하는
경지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은이가 여러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헷갈리지 않고 '시지모모'를 선택했던 그 첫날, 수정씨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쾌거를 전하는 아나운서처럼 의기양양했다.

정말이지 집에서 남편과 내가 조용히 물어도 답은 시지모모였다. 처음엔 강압에 의한
자백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자주 시지모모를 찾고 시지모모 집에 가겠다고 떼쓰는
경우도 잦으니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역시 아이는 아이. 한동안 그런 질문 없는 속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른
이모가 "소은아, 시지모모가 좋아? 혜영이모가 좋아?" 그러면 "혜잉이모"해버리는
것이었다. 연이어 "소은아 그럼 시지모모가 좋아? 은선이모가 좋아?" 그러면 또 "은쩌이모"
했다.

그러면 수정씨의 훈련은 한층 강도가 높아졌다. 이제 아빠와 엄마를 하나씩 끼워서
견주는 지경까지 갔다. 그래도 소은이는 천연덕스럽게 모두 시지모모를 선택했다.
"소은아, 엄마가 좋다고 안 해도 돼. 난 니 맘 알어. 쯧쯧 불쌍한 것."
나는 그러고 말지만 제 아빠는 밤중에 애들 재우면서 또다시 은밀하게 묻고 만다.
"소은아, 시지모모가 좋아? 아빠가 좋아?"
"시지모모."
"에잉? 진짜? 진짜야? 시지모모가 더 좋다고?"
실망스런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다시 재차 물었다.
"소은아, 다시 잘 생각해 봐. 시지모모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빠가"
그러면 남편은 아주 자지러졌다. 소은이를 안고 물고 빨고 어르고 들까불고 야단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또 여럿이 볼일이 있었을 때 어젯밤 이야기를 하며 역시 아빠팬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면 또다시 수정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예의 그 질문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참지 않고 소리를 버러럭 질렀다.
"다들 그만 두지 못해∼? 우리 소은이 좀 내비둬. 이제 고만하라구. 다시 그런 질문하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둘껴. 이러면서 애가 약아지는 거란 말야. 아휴, 진짜."

휴! 모두들 소은이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래, 딱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허벅지살 통통하고 두 볼이 터질 듯 빵빵한 앙징맞은 내 작은딸에게 어른들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소은아, 이 가엾은(?) 어른들에게 적선하는 셈치고 골고루 돌아가며 좋다고 해주려무나.
엄마 생각에는 그게 좋겠구나. 내 사랑스러운 딸. 얼마나 고된고? 이 밤, 그 푸진 엉덩이
뒤로 쭉 빼고 모로 누운 네 옆에서 자고 싶구나.



*사진: 언니의 가랑이 사이에서 잠든 소은이. 한 점의 연출도 없었던 사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