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내리사랑과 치사랑

M.미카엘라 2000. 3. 8. 15:23
소은이가 입원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주말과 휴일, 꼬박
만 이틀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열에 시달렸다.
월요일엔 소미를 하루 내내 이웃에게 맡겨두고 개인 소아과에서 준 종합병원쯤
되는 곳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너무 어린 탓에 개인 병원 측에선 혈관주사를
조금 꺼려하는 듯했다. 집에서 이온 음료를 계속 먹여보고 그래도 축 쳐져
있으면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했지만 집에 오자마자 바로 큰 병원으로 가야할
듯싶었다.
심한 탈수 증세에 비해 너무 먹질 않았기 때문에 지난밤처럼 잠 못 이루고
앓는 일을 되풀이하기엔 겁이 났다. 수저로 떠 먹이자니 온몸을 적셔주기엔
양이 턱없이 부족했고 우려했던 대로 젖병은 빨지 않았다.
의사는 목이 너무 붓고 염증이 심하다고 했다. 입원을 하든지 혈관주사를
한 두 시간 맞고 집에 가서 돌보든지 하라는데 소미 때문에 입원할 순 없었다.
혈관주사를 맞고 경과를 보기로 했다.
그러나 채혈하고 항생제 투여 전 간단한 테스트까지 고생고생하며 해냈건만
결국 혈관주사를 놓는 데 실패했다. 핏줄이 너무 가는 데다가 젖살이 한창
올라있던 터라 팔, 손등, 발목 등에 서너 번씩 바늘을 꽂았지만 혈관을 찾지
못했다. 먹지 못한 아이가 버둥대며 우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어찌어찌 찾아서 조금 약이 들어가나 했지만 곧 멈추다시피 안 들어가고,
그나마 들어간 약은 터진 핏줄 바깥으로 샜는지 손등이 부어 올랐다. 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그 정신에도 간호사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독한 에미될 것 각오하고 한 번 더 시도해달라고 말했다. 간호사도
안쓰러워 하면서 "그래 이것만 맞으면 눈에 띄게 좋아질 텐데 미안하구나"
했다. 그러나 결국은 포기하기로 했다.
간호사가 의사에게 연락하겠다고 나간 사이 소은이는 지쳐 잠이 들었지만
곧 깊은 잠을 못 이루고 깨서 힘없이 울었다. 입이 완전히 타서 울 때마다
갈라진 틈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마른 입 안으로 물기 하나 없는 혀가 발발
떨렸다. 나는 손톱만한 기대감을 가지고 준비해갔던 이온 음료를 담은 젖병을
꺼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쭉쭉 빨기 시작했다.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다.
"이젠 우리 소은이 살았다"하는 말만 중얼거렸다. 시원한 소나기 한줄기 맞는
기분이었다.
단숨에 150ml를 먹었다. 옆에서 다른 주사를 맞던 할머니들이 "다행이다.
먹기만 먹으면 애기들은 금방 기력을 차리지. 에구 엄마 젖이 새나부다. 다
젖었네. 아가야 얼른 기운 채려서 젖 먹어라. 잘 안 아플 것처럼 똘똘하게
생겼는데." 하셨다.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 다른 곳으로 감염도 없고 전해질 발란스가 깨질 정도로
탈수가 심하지 않으니, 탈수증 치료제를 물에 타 먹이고 약을 먹이면 되겠다고
했다. 내일 오라는 말과 함께.
집에 돌아오니 저녁 6시 30분이 넘었다. 불이나케 소미에게 가보니 엉엉 울면서
지훈이 엄마에게 안겨 있었다. 내내 잘 놀다가 조금 일찍 그집 아빠가 퇴근을
해서 온 후로 이렇게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운다고 했다. 날도 어둑해져 있는
데다가 남의 집 아빠를 보니 나도 이젠 집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 가지고 간 방울토마토를 내려놓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내일 병원에 가야 하면 또 놀게 하라는 지훈이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소미를 안고 내려왔다.
소미는 집에 오니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으니까 너무 좋은지 언제 울었냐
하며 온갖 수다를 종알종알댔다. 소은이는 기력이 여전했지만 약을 먹고 탈수증
치료제 탄 달착지근한 물을 150ml 더 먹고는 잠들었다. 숨소리가 한결 고르다.
입을 벌리고 짧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듯 하던 아이가 편안해 보였다.
잠든 아이를 보니 부모 때문에 이 세상에 나와 고생이 많구나 싶었다. 불쑥
마흔 셋에 나를 둔 엄마가 왜 늘 "우리 막냉이를 보면 오래 살아야 할 텐데"하는
말을 했나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자식을 둔 부모라면 건강하게
최선을 다해 오래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느낀다. 사고로 부모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는 경우, 자식들의 불행을 하늘에서 보고 있자면 가슴에 피가 맺힐
노릇 아닌가.
그래도 자식은 부모를 내치는 일이 잦으니, 소은이가 누워 있던 주사실 한
침상에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다 두고 외딸에게 병수발을 받는 어머니가
있었다. 코앞에 살아도 얼굴을 안 비친다는 올케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딸은,
씩씩했다. 아들이 왔다가 정작 엄마의 소변을 받아야 할 땐 슬그머니 나가버리니
누나 혼자 엄마에게 큰소리를 해가며 애를 썼다.
"딸을 낳으려면 서넛이나 낳지. 왜 하나만 달랑 낳아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해"
그래도 그런 거친 투정은 어머니가 안쓰러운 마음에서 나온 말인 줄 단박에
알아 볼 수 있게 충분히 애정 어리게 느껴졌다. 멍한 어머니의 표정에 얼핏
웃음이 스쳤다. 어떤 뜻일까. 그 어머니도 자식이 태열이 있으면 혀로 핥아주고,
홍역으로 끓어오르면 방안에서 업고 서성이며 그대로 밥을 굶었을지 모를
일이다.
내리사랑은 조건없이 샘솟아도 치사랑은 그러기 힘든 까닭이 무엇일까.
하루종일 소은이를 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친정 엄마가 생각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 맞잽이라고 생각했던 큰오빠가
뇌수술 후 아직도 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늙으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며
치사랑이 가지는 한계를 씁쓸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