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충전소

그녀는 굳세다

M.미카엘라 2004. 4. 25. 09:04
 

 아무래도 소은이는 유독 자신한테만은 유난히 게으름을 부리는 엄마 덕분에 독립심 하나만큼은 제대로 생겨날 듯싶다. 종종 앞집에서 ‘너무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나는 소은이에게 세세하게 굴지 않는다.

 

 유치원버스 타러 나간 소은이가 창밖에서 소리쳤다.

 “엄마, 비가 와요!”

 “그래? 음… 어떡하지? 엄마가 우산 던져줄까?”

 “네!”

 퍽! 4층 창문에서 몸을 내밀어 살 하나가 부러진 하늘색 우산을 던져줬다. 그 순간 ‘뛰어 내려갈까?’하는 마음이 생겼지만 귀찮기도 해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소은이는 며칠 동안 입안이 아프다고 밥이고 과일이고 통 제대로 못 먹었다. 죽을 끓여주었더니 제 딴에도 조심조심 한다하는 표정인데, 한 숟갈 먹을 때마다 곧 아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기 일쑤였다. 나도 의사선생님도 입안을 샅샅이 보았지만 이렇다 할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인데, 어느 부분에 약을 묻힌 면봉을 대면 갑자기 자지러졌다. 겉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속으로 상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보통 입속 상처는 금방 낫는데 쉽사리 눈에 띄는 곳이 아니라 그랬는지 오래도 갔다.


 우산을 던져준 그날도 소은이는 집에서 끓인 죽을 먹고 집을 나선 터였다. 아프지 않을 때도 한 식품전문회사에서 만든 죽을 사먹길 좋아해서 이틀째 유치원에 그 회사 죽을 사가지고 가게 했다. 새우죽을 먹고 싶다고 해서 돈 2400원을 손에 쥐어줬다. 천원짜리 두 장, 백원짜리 네 개를 쥔 작은 손은 꽤 벅차보였는데, 그 손으로 다시 엄마가 던져준 우산을 펴들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엄마.”

 순간 짤랑! 우산을 펴려고 똑딱 단추를 뗀 순간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산을 펴서 전열을 가다듬는데 또 짤랑! 동전소리가 났다.

 “어! 어디갔지?”

 4층에서 반쯤 몸을 내민 내 눈에는 반짝이는 두 개의 동전이 훤히 보였다. 소은이는 보이지 않고 한쪽이 찌그러진 하늘색 우산만 빙글빙글 동전을 찾는 눈치인데 쉽사리 찾지 못했다.


 “소은아. 저기저기 오른쪽 옆. 아니아니 오른쪽. 밥 먹는 손쪽 말야.”

 “밥… 먹는 손쪽요…?”

 “그래그래 바로 거기. 발 옆에 보이지? 보여?"

 “아, 찾았다!”

 “또 하나는 잔디 있는 화단 쪽으로 조금만 와봐! 네 걸음만.”

 “어디요?"

 “시멘트 발라놓은 턱 있는데서 가까워. 조기 있잖아 조기!”


 아, 참! 나도 참 어지간했다. 뛰어 내려갔으면 벌써 후다닥 집어주었을 것을 계속 중계만 했다.

 “찾았어요 엄마!”

 “그래? 잘됐다. 근데 동전이 모두 몇 개야?”

 “음…네 개요.”

 “맞아! 이제 어서 가! 버스 왔겠다. 우산은 어깨에 걸쳐 응? 그래야 손이 편해!”

 “네, 엄마. 걱정 마세요.”


 다시 하늘색 우산이 재빠르게 타다닥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고개를 드니 창밖으로 보이는 앞산은 벌써 푸르러서 신록의 싱그러움을 그리고 있었다. 밥도 시원찮게 먹고 나선 길에 비까지 오는데, 혹시 유치원버스가 와서 기다리는 바람에 죽도 사지 못하고 탄 것은 아닐까 싶어서 걱정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하늘색 우산에게 건투를 빌밖에 도리가 없었다.


 점심쯤 가게에 가서 동향을 살피니 소은이가 죽을 사가지고 갔다고 하셨다. 새우죽이 없다고 하니까 옆 가게로 달려가더니 곧 다시 돌아와, ‘그냥 소고기 죽이라도 주세요’ 하더란다. 옆 가게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은이 고거 참, 소미 없이도 참 씩씩하게 잘 다녀요.”

 주인아저씨 말씀이다. 그 옆에 계신 아파트관리소장님이 한마디 거드셨다.

 “내가 아침마다 저쪽에서 소은이가 혼자 걸어오는 걸 자주 보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발걸음이 까불까불 가볍고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그리고 또 누가됐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짱짱한 목소리로 인사를 그렇게 잘 한다니까. 참 안 이뻐할래야 안 이뻐할 수가 없는 애야.”

 나는 어른들의 칭찬보다 소은이가 제대로 죽을 사서 잘 갔다는 말에 우선 기분이 좋았다.

 

 “미안해. 엄마가 아침에 죽 사줄 걸. 돈 쥐고 우산 드느라고 힘들었지? 요즘 잘 못 먹어서 기운도 없을 텐데.”

 오후에 돌아온 소은이에게 미안한 말을 전했더니 대답이 더 씩씩하다.

 “아휴, 괜찮아요. 전 이제 여섯 살 언니잖아요. 여섯 살 언니가 그런 것도 못하면 다섯 살 별님반 동생들이 흉봐요. 그리고 엄마, 저 이제 아침에 우유랑 빵, 계란후라이 뭐 그런 거 먹고 갈래요. 그게 엄마도 좋고 편하잖아요.”

 “어이구, 이쁜 똥개! 엄마 생각해줘서 고마워. 근데 밥을 먹어야지. 아빠도 언니도 엄마도 모두 밥을 좋아해서 밥은 어차피 해야 되니까 걱정하지 마. 소은이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 해도 그건 곤란해.”


 이제 소은이는 입이 다 나았다. 빵빵한 볼 살이 쏘옥 빠졌는데 이제 얼마나 먹어대는지 내가 오히려 말려야 할 판이다. 늦게 일어난 토요일 아침. 삶은 달걀과 고구마를 요구르트와 먹고 조금 있다가 점심 때 호박, 당근 채 썰어 볶은 것, 김가루까지 넣은 멸치국물 국수를 해주었더니 헐렁하게 두 그릇을 먹고, 두 시간 후 다시 남은 국수를 소미와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가게집 가서 달걀 사가지고 와라 했더니 소미와 달리 흔쾌히 좋아라하며, 가지고 노는 플라스틱 시장가방을 들고 후다닥 다녀왔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김밥을 싸면서 너희들도 한번 엄마랑 재료준비하고 싸는 것까지 해보아라 했더니, 열심히 손가락 쪽쪽 빨아가며 싼 꼬질한 김밥을 “내 사랑이 들어있어서 더 맛있다”면서 한 줄을 뚝딱 먹었다. 그리고 다시 과일 내놔라, 과자 달라, 내일은 감자탕 먹으러 가자 요구가 끊이질 않았다.


 된통 나흘의 열 감기를 앓고 난 후 아직 제 입맛이 돌아오지 않은 듯한 소미와 달리 지금은 소은이가 ‘거지 뱃속’이다. 뭐든 심부름 해달라고 하면 흔쾌히 하고, 성질 급한 내가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서 뭐든 해주려고 하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며 결국 혼자 하고 만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독립은 내가 더 게을러져야 완성될 듯싶다. 급한 성질 꾹 눌러 죽이고 해주고 싶어서 손가락 끝이 간질거려도 참고 보자면, 아이들은 어느새 내 생각보다 잘 해내거늘 조급증과 노파심을 버릴 일이다. 두 아이가 칫솔로 문질러 빨아 넌 하얀 실내화 네 짝이 서로 얼굴 마주보며 4월 오후 햇살 속에서 보송보송 고소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선글라스, 한양대

 

 

익살, 눈 땡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