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밥싸움
M.미카엘라
2000. 4. 19. 09:02
요즘 늘 "엄마, 먹을 것 좀 주세요"하는 말은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밥은
잘 안 먹는 소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결국 오늘 부부싸움까지
하고 말았다. '짧고 그리 무겁지 않은' 부부싸움이었는데 결과는 나의 KO패였고
지금도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다.
며칠째 냉장고는 텅텅 빈 채로 어찌어찌 밥을 해먹다가 저녁에 장을 보았다.
내가 혼자 아이들 데리고 장보기가 힘들어 꼭 남편이 가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해도 금방 갈 수가 없다. 급한 대로 PX와 그 옆 부식
가게에서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다.차로 한 7분 거리
되는 가까운 할인 수퍼마켓에 갔다. 어두워진 뒤였지만 바람도 없고 기온도
차지 않아서 소은이를 업고 덮어씌우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도 가볍게
미리 적은 목록을 들고 느릿느릿 장보기를 즐겼다. 소미는 제 아빠가 끄는
쇼핑카트에 앉아서 재잘거리며 한참 신이 났다. 둘은 다른 코너로 몸을
쏙 숨기기도 하면서 뭘 사는 것 같았다.
다 된 것 같아서 계산대로 가려다가 팽이버섯하고 몇 가지가 더 생각나는
걸 사려고 채소 코너로 간 사이, 남편은 얼추 계산을 끝내놓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간 장바구니 두 개와 비닐봉지 하나, 포장할 수 없는 다른 큰 덩치
물건 세 덩이를 실었다.
아직 저녁식사 전이라 어떻게 되는대로 밥을 먼저 먹고 반찬은 내일하자
하는 생각을 하며 가는데, 소미가 "아빠, 나 꿀꽈배기 먹을래" 그랬다. 제
아빠는 "집에 가서 먹자"라고 말하는데 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밥부터
먹고 다른 거 많이 먹자?"하고 바꿔 말했다. 그랬더니 대뜸 또 소미는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나는 급기야 걱정하던 마음이 부아가 치미는 걸로
바뀌었는데 결국 집에 와서 폭발하고 말았다.
소미는 오자마자 장바구니에서 냉큼 과자를 한 봉지 꺼내서 가위로 윗부분을
잘라냈다. 안 된다고 입으로 그러면서 부랴부랴 냉장고에 넣을 것을 정리
하다보니, 부녀지간에 언제 이렇게 많이 집어넣었는지 냉동피자며 아이스크림,
과자, 펭귄 모양 용기에 든 사탕까지 참 가관이게 군것질거리가 많았다.
"집에도 아직 과자가 많은데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반찬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내참."
그러면서 시작된 잔소리는 소미가 바나나를 먹겠다고 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남편도 합세해서 과자를 먹는데 도저히 입이 통제가 안 되게
화가 났다.
"아무튼 소미 입은 자기가 다 망쳐. 조금만 참으면 될 걸 그렇게 먹으면
그렇잖아도 애가 밥을 안 먹어서 스트레스 받는데… 애 식습관에 도움이
안된다니까, 도움이."
"소미, 너 그래 바나나 실컷 먹어라. 언제까지 밥 달란 소리 안 하나 두고
보자. 아냐. 너 이제부터 밥 먹지 마. 밥 달라고 하면 엄마가 혼내줄 거야?
알았어?"
그랬더니 소미는 바나나를 들고 있는 내 손만 보며 '그러면 좋죠. 알았으니까
얼른 바나나나 주세요'하는 투로 냉큼 "네" 그러면서 내 화를 돋궜다.
나는 거기서 그쳤어야 했는데, 소미가 조금 있다가 또 밥이 아닌 "엄마,
우유 주세요"하는 바람에 계속 두덜두덜거리며 밥상을 차렸다. 요즘 나도
이상하게 짜증이 늘어있는 걸 느끼는데 물 만난 고기(?)처럼 막 퍼대듯 신경질을
부린 것이다.
그때 남편이 먹던 과자봉지를 휙 내팽겨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집에서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낮에 애들한테 시달리고 밤에
원고 쓰느라고 힘들 것 같아서 반찬 없어도 차려주는 대로 아무소리도 않고
먹잖아. 그렇게 소미가 밥을 안 먹으면 애라도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서
먹도록 해야 할 거 아냐. 애들이 오징어젓 놓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싶겠어?"
억!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쥐구멍을 들어가고 싶을 만큼. 그리고 너무 미안했다.
조금 전 내 그 등등한 기세는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른 채, 속을 들킨 모습을
감추려고 황망하게 만둣국만 끓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서 친구가 물어다주는 사보나 신문기사 쓰는 일을 조금 한다. 애들
때문에 주로 밤에 잠을 줄이며 하는데, 요즘은 다른 집안 일은 그럭저럭하면서도
참 반찬이 안 만들어진다. 소은이 죽만 어찌어찌 끓여 먹이면서 사실
반찬은 형편없다. 오늘 점심도 미역국에 김치, 오징어젓, 달걀부침을 놓고
먹었다. 소미는 그 잘 먹던 미역국에도 밥을 겨우 조금 먹었을 뿐이다.
그래서 장보기 전에 이런저런 잡지를 보면서 우리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해줄 반찬을 찾았었다. 밥상을 차릴 때마다 늘 미안하고 볼 낯이 없었던
차였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속을 들키면서 그이의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내니
정말 어쩔 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소미는 결국 바나나와 우유 반 컵을 먹고 이만 닦고는 아빠, 엄마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피해 잠들었다. 소미 아빤 그렇게 해놓고도 나에게 하는 품으로
보아선 그다지 계속 화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 고마웠지만 내 마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미안해. 반찬이 형편없어서 그렇지 않아도 늘 미안한 참이었는데, 자기 말이
다 맞아."
그렇게 밥상을 앞에 놓고서 사과를 했는데도, 남편이 먼저 잠든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소미에게도 미안하다. 사실 좀더 먹는 것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안 먹는다고 소리소리 들어가며 저렇게 잠이 들었으니 나 참말이지 엄마
맞나 싶다. 다른 집 엄마들은 얼마나 잘해 먹이는 줄 알면서도.
내일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서 국 끓이고 반찬도 서너 가지 해야겠다. 이 글을
반쯤 쓰다가 뭘 잘못해서 홀딱 날리고 다시 쓰다보니 벌써 밤 두 시가 넘었다.
잘 안 먹는 소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결국 오늘 부부싸움까지
하고 말았다. '짧고 그리 무겁지 않은' 부부싸움이었는데 결과는 나의 KO패였고
지금도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다.
며칠째 냉장고는 텅텅 빈 채로 어찌어찌 밥을 해먹다가 저녁에 장을 보았다.
내가 혼자 아이들 데리고 장보기가 힘들어 꼭 남편이 가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해도 금방 갈 수가 없다. 급한 대로 PX와 그 옆 부식
가게에서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다.차로 한 7분 거리
되는 가까운 할인 수퍼마켓에 갔다. 어두워진 뒤였지만 바람도 없고 기온도
차지 않아서 소은이를 업고 덮어씌우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도 가볍게
미리 적은 목록을 들고 느릿느릿 장보기를 즐겼다. 소미는 제 아빠가 끄는
쇼핑카트에 앉아서 재잘거리며 한참 신이 났다. 둘은 다른 코너로 몸을
쏙 숨기기도 하면서 뭘 사는 것 같았다.
다 된 것 같아서 계산대로 가려다가 팽이버섯하고 몇 가지가 더 생각나는
걸 사려고 채소 코너로 간 사이, 남편은 얼추 계산을 끝내놓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간 장바구니 두 개와 비닐봉지 하나, 포장할 수 없는 다른 큰 덩치
물건 세 덩이를 실었다.
아직 저녁식사 전이라 어떻게 되는대로 밥을 먼저 먹고 반찬은 내일하자
하는 생각을 하며 가는데, 소미가 "아빠, 나 꿀꽈배기 먹을래" 그랬다. 제
아빠는 "집에 가서 먹자"라고 말하는데 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밥부터
먹고 다른 거 많이 먹자?"하고 바꿔 말했다. 그랬더니 대뜸 또 소미는 밥을
안 먹겠다고 했다. 나는 급기야 걱정하던 마음이 부아가 치미는 걸로
바뀌었는데 결국 집에 와서 폭발하고 말았다.
소미는 오자마자 장바구니에서 냉큼 과자를 한 봉지 꺼내서 가위로 윗부분을
잘라냈다. 안 된다고 입으로 그러면서 부랴부랴 냉장고에 넣을 것을 정리
하다보니, 부녀지간에 언제 이렇게 많이 집어넣었는지 냉동피자며 아이스크림,
과자, 펭귄 모양 용기에 든 사탕까지 참 가관이게 군것질거리가 많았다.
"집에도 아직 과자가 많은데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반찬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내참."
그러면서 시작된 잔소리는 소미가 바나나를 먹겠다고 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남편도 합세해서 과자를 먹는데 도저히 입이 통제가 안 되게
화가 났다.
"아무튼 소미 입은 자기가 다 망쳐. 조금만 참으면 될 걸 그렇게 먹으면
그렇잖아도 애가 밥을 안 먹어서 스트레스 받는데… 애 식습관에 도움이
안된다니까, 도움이."
"소미, 너 그래 바나나 실컷 먹어라. 언제까지 밥 달란 소리 안 하나 두고
보자. 아냐. 너 이제부터 밥 먹지 마. 밥 달라고 하면 엄마가 혼내줄 거야?
알았어?"
그랬더니 소미는 바나나를 들고 있는 내 손만 보며 '그러면 좋죠. 알았으니까
얼른 바나나나 주세요'하는 투로 냉큼 "네" 그러면서 내 화를 돋궜다.
나는 거기서 그쳤어야 했는데, 소미가 조금 있다가 또 밥이 아닌 "엄마,
우유 주세요"하는 바람에 계속 두덜두덜거리며 밥상을 차렸다. 요즘 나도
이상하게 짜증이 늘어있는 걸 느끼는데 물 만난 고기(?)처럼 막 퍼대듯 신경질을
부린 것이다.
그때 남편이 먹던 과자봉지를 휙 내팽겨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집에서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낮에 애들한테 시달리고 밤에
원고 쓰느라고 힘들 것 같아서 반찬 없어도 차려주는 대로 아무소리도 않고
먹잖아. 그렇게 소미가 밥을 안 먹으면 애라도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서
먹도록 해야 할 거 아냐. 애들이 오징어젓 놓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싶겠어?"
억!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쥐구멍을 들어가고 싶을 만큼. 그리고 너무 미안했다.
조금 전 내 그 등등한 기세는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른 채, 속을 들킨 모습을
감추려고 황망하게 만둣국만 끓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서 친구가 물어다주는 사보나 신문기사 쓰는 일을 조금 한다. 애들
때문에 주로 밤에 잠을 줄이며 하는데, 요즘은 다른 집안 일은 그럭저럭하면서도
참 반찬이 안 만들어진다. 소은이 죽만 어찌어찌 끓여 먹이면서 사실
반찬은 형편없다. 오늘 점심도 미역국에 김치, 오징어젓, 달걀부침을 놓고
먹었다. 소미는 그 잘 먹던 미역국에도 밥을 겨우 조금 먹었을 뿐이다.
그래서 장보기 전에 이런저런 잡지를 보면서 우리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해줄 반찬을 찾았었다. 밥상을 차릴 때마다 늘 미안하고 볼 낯이 없었던
차였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속을 들키면서 그이의 불만을 고스란히 받아내니
정말 어쩔 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소미는 결국 바나나와 우유 반 컵을 먹고 이만 닦고는 아빠, 엄마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피해 잠들었다. 소미 아빤 그렇게 해놓고도 나에게 하는 품으로
보아선 그다지 계속 화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 고마웠지만 내 마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미안해. 반찬이 형편없어서 그렇지 않아도 늘 미안한 참이었는데, 자기 말이
다 맞아."
그렇게 밥상을 앞에 놓고서 사과를 했는데도, 남편이 먼저 잠든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소미에게도 미안하다. 사실 좀더 먹는 것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안 먹는다고 소리소리 들어가며 저렇게 잠이 들었으니 나 참말이지 엄마
맞나 싶다. 다른 집 엄마들은 얼마나 잘해 먹이는 줄 알면서도.
내일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서 국 끓이고 반찬도 서너 가지 해야겠다. 이 글을
반쯤 쓰다가 뭘 잘못해서 홀딱 날리고 다시 쓰다보니 벌써 밤 두 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