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학교

꿈으로 남은 녹색여행

M.미카엘라 2000. 5. 5. 15:39
아니다. 원래 이게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번 제목은 <보성 차밭을 다녀와서>
내지는 <향기로운 차밭여행> <보성 차밭과 화순 운주사> 쯤이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쯤 녹색 차밭 물결 속에서 '눈 시원, 마음 깨끗해!'하면서
황홀해하고 있거나, 수수하고 토속적인 부처상이 여기저기 서있거나
누워있는 운주사 경내에서 유모차나 한들한들 끌며 그들의 속살거림을 듣고
있어야 마땅하다. 끙! 그런데 결국 못 갔다.
보성 차밭을 다녀오는 내 오래된 행복한 여행계획이 구체적으로 꿈틀댄 건,
소미아빠 부대의 최고지휘관이 새로 오신 후 부하들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엔
당사자를 하루 쉬게 해주시겠다는 발표 때부터였다. 소미아빠는 생일이
늘 5월 4일이다. 그러니 어린이날과 이어져 그야말로 황금연휴를
맞이한다는 부푼 꿈을 갖고 약 한 달 전부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보통 여행계획 속에서 행선지를 잡는 일은 내가 한다. 5월 10일 이전에
이틀 정도 있다는 다향제에 딱 맞춰 갈 수는 없지만, 아무튼 요즘 보성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한다.
화순에 있는 군 휴양시설에 하루밤 예약도 했다. 군에서 운영하는 것도
있지만 민간시설의 몇 객실 정도를 따로 떼어 군인들에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있다. 우린 저렴하게 하나를 예약하면서 "참, 군인이 좋아, 응?"
하며 흐뭇해했는데 으윽, 그 군인이라는 직업이 이렇게 우리의 여행을
깡그리 무너뜨렸다. 4일 새벽에 출발하자던 계획은 사흘 전 남편이
"우리 보성 가는 거 4일 날 10시쯤 출발하면 안 될까"하는 바람에 조금
흔들하더니, 하루 전 예약취소를 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남편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을 번히 알면서 크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나한테 말 걸지마. 폭발해. 일주일 동안 웃는 얼굴 볼 생각 마"하면서
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건가.
"쌀쌀하거나 비라도 오면 억울하지도 않지" 하면서 비맞은 중처럼
꿍얼꿍얼댔다.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죄인 얼굴이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들떠서 정신 못 차린 마누라한테.
난 아직 군인의 아내로 이골이 날려면 멀었구나 싶다.
"아무개 가족이랑 저녁 먹을 거니까 준비해. 십 분 후에 데리러 갈게."
"지금 빨리 애들 준비시켜. 어디 갈 거야."
"반찬 좀 있어? 지금 아무개 총각 소대장 데리고 간다? 밥 좀 먹이게."
자주 이런 식이다. 예측불허에다가 늘 시간은 고양이 오줌처럼 쬐끔 준다.
'신속한 아내'는 큰 미덕이라 애들 둘 잡아서 옷 입히고, 나 옷 입고,
가방 준비하고 문단속을 급히 하면서 "북한의 도발도 아마 어떤 조짐이나
예고편은 있을 거야. 이거야 원 피난민도 이것보단 낫겠다" 하고 투덜거린
날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획이 코앞에서 틀어질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지나치게
기대하고 들뜨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여행의 '여'자도 모르고 차는 '붕붕차'
밖에 모르는 소미에게까지 "우리 여행갈 거야, 소미야. 저기 멀리
보성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 초록색 녹차밭이 무척 아름답대. 거기 엄마랑
아빠랑 소은이랑 가자아? 좋겠지?"하면서 입방아를 찧어놨으니 나도
참 딱하다.
"소미야, 우리 여행 못 가게 되었어. 아빠 땜에."
"이잉, 그럼 소미 울 거야이."
"그럼 어떡해?"
"빨리 여행가잉."
오늘은 어린이날이지만 우린 집에 있다. 어제 늦게 누가 소미아빠 생일이라고
생크림 케잌을 사주었는데, 냉장고에 그대로 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작은 초
여섯 개를 꽂고(소미 네 개, 소은이 두 개) 남편이랑 내가 노래를 불렀다.

어린이날 축하합니다. 어린이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소미 소은. 어린이날 축하합니다.

그랬더니 소미가 "엄마, 오늘은 소미 생일이야?" 그런다. 어린이날이라고
말해줘도 '무슨 소린지…'하는 얼굴이다. 이럴 때가 머리 시원할 때지 싶다.
좀 뭘 알기 시작하면 어린이날 방콕(방에만 콕 박혀 있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오전 10시에 한 시간 거리인 애버랜드로 출발한 희주네는 오후
1시가 다 되었는데 아직 도착도 못했단다.
텔레비전에서 못 보던 광고를 한다. '배움닷컴'이라는 인터넷회사 광고인데,
우익! 보성 차밭이다. 나는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컴퓨터 앞에 앉은 소미아빠 등 여기저기를 막 꼬집었다.
"저거 봐, 저거 봐. 빨리빨리! 저기가 보성이야. 아주 광고까지 염장을 지르는구나.
내가 못살아. 으흐흐, 꺼이꺼이."
그이는 그렇게라도 해서 풀린다면 날 잡아 잡수하듯 꿈쩍도 안 한다.
다시 내년 5월을 기약했다. 아주 진도까지 내쳐 가자고 굳게 맹세했지만,
우리끼리 '맹세'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늘이 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