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말,말,말!

야무진 입, 얄미운 입, 걱정스런 입

M.미카엘라 2000. 5. 12. 23:02

딸들이 또 한 사흘 병원 신세를 졌다. 소은이가 휴일과 월요일에 두드러기
증세를 보였는데 그게 가라앉고 나니, 둘 다 또 함께 목감기가 와서 열이 났다.
병원을 가는데 소미는 계속 주사는 안 맞겠다고 자기 포부(?)를 늘어놓았다.
"그래, 엄마가 선생님께 말씀은 드려볼게. 소미 되도록 주사 주시지 말라구
말야. 그런데 주사를 꼭 맞아야 한다면 좀 참고 맞아야지 뭐. 우리 소미 전에도
씩씩하게 잘 맞았잖아. 그치?"
"그래도 안 맞을 거야. 약만 타 올 거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진짜 주사를 안 맞게 된다고 생각하는지 주문을 외듯
계속 병원 문 앞까지 되풀이 말했다.
접수를 하고 횡재하듯 별로 기다리지 않고 우리 차례가 되었다.

"소미, 소은이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미가 휘적휘적 씩씩하게 앞장서 걸어
들어가자마자 대뜸 의사에게 이러는 거였다.
"의사 성생님. 저요 네에, 있잖아요. 소미요, 주사는 안 맞을 거구요.
약만 주세요. 네?"
너무 예상치 못한 말을 짱짱하게 속사포처럼 말릴 틈도 없이 해대는 통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여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받는 말이
더 걸작이다.
"어휴, 잘나셨어요. 니가 성생님 하세요. 우리 자리 바꾸자. 니가 나 좀 봐줄래?
그러면 되겠다."
소아과 선생님이 받는 말치곤 그리 곱진 않지만 '우리 딸이 너무 잘나서'
먼저 던진 말이 좀 얄밉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드니 그냥
웃어졌다.

나는 요즘 좀 걱정이다. 입이 야무진 것이 무슨 걱정이랴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내 새끼니까 이쁘고 앙징맞은 거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참 입만
되바라졌네" 할 수도 있고, 어른 말 냉큼 받아서 받아치기라도 잘 한다면 얼마나
밉살스러울까 생각하니 앞으로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조근조근 하니 남편도 "그렇겠다. 어쩌지?" 했다.

한번은 소미보다 약 6개월이 빠른 친구 서연이가 놀러왔다. 신체 발육은 보통
그 월령 아이들보다 훨씬 컸지만 말이 늦되서 나는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도 있다. 서연이는 우리집만 오면 안 가려고 해서 엄마가 애를 먹는데
그날도 또 안 가려고 울고 떼쓰고 "엄마 미워, 아빠 미워"를 연발했다.

그때 우리집 공주님(공포의 주○아리님)이 떡하니 나서서 하는
말이 "서연아, 이제 집에 가야지? 내일 또 놀러 오면 되자나. 아, 착하다"
였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자기가 다 하는 것이었다. 서연이는 소미를
보며 앙앙대고 울고 나는 좀 미안했다. '으이그,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소미 아빠도 벌써 퇴근해 있었고 한참을 이리저리 달래는데 순순히 올려보
내기는 어려울 듯 막무가내로 울기만 했다. 소미는 어느새 서연이는 신경도
안 쓰고 깊은 장난감 통에 거꾸로 쳐박힐 듯하며 찾아낸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한참을 인내심을 가지고 서연이 엄마가 달래는데 조금 후에 소미가 갑자기
또 등장해서 서연이 약을 바싹 올려놓고 말았다. 레고나 옥스포드 블록 속에
들어있는 작은 빨간색 삼각형 깃발 두 개를 찾아서 들고는 건들건들대며
이랬다.
"청기 올리고 백기 내리고, 청기 올리고 백기 내리고."

만화영화<스머프> 주제 음악에 맞춰 부르는 깃발 놀이를 TV에서 한 번
보고는 그걸 따라하는데, 그 상황에서 그 유쾌한 노래가 가당키나 한가.
조금 울음이 잦아들었던 서연이는 또 크게 울어대고 내가 봐도 서연이는
지금 소미가 얼마나 얄미울까 싶은 게 참 미치겠다.

서연이엄마한테도 늘 미안하다. 말수도 적고 말도 아직 정확치 않은 유순한
서연이를 소미가 자주 답답해하며 가르치려드니 말이다. ' 그래,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알면 이미 애가 아니지. 내가 참자' 하지만 걱정스럽긴 마찬
가지다. 소미의 입을 내가 저렇게 만들었나 싶으니까, 다시 소미 입에 제일
적당한 '인공지능 제어기기'를 달 일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에미는 자식이 잘 못 자라는 것 같으면 죄인 심정으로 자기
모습을 마음거울에 비춘다. 소미가 뭐 크게 나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즈음 내 말습관 점검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