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른 말
여름이 다 갔다. 아침저녁 바람이 시원하다. 먼 산그늘이 짙고 깊어서 같은 햇볕도 한결 다르게 느껴진다. 며칠 전 시어머님 회갑을 조촐하게 치르고 나니 비로소 나의 가을이 한결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간 오전, 창 너머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은 내게 커피 물 올려놓으라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제는 더위 핑계 삼아 한껏 늘어져 지냈던 마음을 추스릴 겸 안 하던 짓을 했다. 큰언니네 집에서 가져온 큼직한 호박 두 개를 얇게 썰어서 채반에 가지런히 널어 둔 것이다. 나는 이 찬란한 가을 햇볕에게 할 일을 하나 마련해주었다. 그걸 보는 마음은 한결 풍요롭다.
소미와 소은이는 방학 내내 할머니 댁에서 2주를 가까이 보내면서 그렇게도 많이 싸웠다 들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도 왜 그렇게 나가 놀지도 않으면서 티격태격 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나가 놀면 집에서 노는 것보다 한결 덜 싸운다. 하긴 한참 동안 무더위가 이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한낮은 뜨거우니, 그 뙤약볕으로 내모는 일도 할 짓은 아니긴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방에 들어가 문까지 닫고 조용하길래 잘 노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무지막지한 소리가 찢어질 듯 밖으로 튀어 들려왔다.
“죽어~!”
분명 소은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막 무엇인가 억울해서 악을 쓰고 울며 덤비는 품이 소리만으로도 눈에 선했다. 나는 모른 체 할까 하다가 싸움의 배경은 알 바 없었고 어찌 되었건 그 무지막지한 말투에 대해선 한번쯤 주의를 주자, 하고 문을 열었다.
“어, 이거 누가 이런 끔찍한 소리를 하냐아~? 세상에…”
일순 조용해졌다.
“누구더러 죽는대? 어느 딸이 이런 가슴 아픈 소리를 해?”
그런데 소은이가 튀어나와 하는 소리가 놀라웠다.
“엄마, 내가 안 그랬어요. 언니가 그랬어요.”
‘햐~! 요것 봐라’ 싶었다. 다 알고 들어왔는데 새빨간 거짓말을 들이댔다. 난 그냥 추궁한다기보다 가볍게 주의만 주려고 시작한 말인데 속으로 ‘이거 안 되겠군.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구만’했다.
“언니가? 정말?”
“네, 언니가 그랬어요.”
소은이는 주저함 없이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아니예요. 엄마. 제가 안 그랬어요. 전 아니예요 엄마.”
소미는 사색이 되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래? 넌 아니라고 하고 소은이는 언니가 그랬다고 한다. 둘 중에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는 소린데… 빨리 말해. 누가 그런 거야?”
“전 아니예요. 엄마 전 정말 그런 말 안 썼어요.”
소미는 소은이가 그랬다는 말을 하진 않고 그냥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만 했다. 소은이에게 다시 한번 물었지만 역시 “언니가 그랬다”는 대답에 변함이 없었다. 나는 조금 오버하면서 소은이가 어찌하는지 보려고 소미를 앞에 세우고 매를 들었다. 동생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언니가 그랬다 하니 엄마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기는 안 그랬다고 울고 나는 곧 매를 종아리에 댈 태세를 했다. 그랬더니 역시 소은이가 반응했다.
“엄마, 언니 때리지 마세요.”
“왜에? 언니가 욕보다 더 심한 그런 말을 동생 앞에서 했다면 크게 혼이 나야지.”
“엄마, 그래도 언니 때리지 마세요.”
“왜에? 언니가 한 말 아냐?”
“아니요. 그래도 때리지는 마세요.”
“소은이가 아니고 언니가 했다며어? 그럼 혼이 나야지. 엄마 말리지 마.”
눈치를 쓰윽 보니 고뇌와 갈등에 찬 표정(?)이 역력했다. 양심상 자기 때문에 언니가 맞는 일을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엄마!”
불러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조금 더 노골적으로 고삐를 죄었다.
“왜에? 언니가 한 게 아냐? 그럼 혹시 소은이가 한 거야?”
“저어… 엄마…”
나는 이제 바른 말이 나오려니 기대했다. 그런데…
“아니요. 엄마. 그냥... 제가... 한 걸로 하세요.”
뭐시라고라? ‘했다’도 아니고 ‘한 걸로 하라’고? 난 기가 막혔다. 참 벌써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눙쳐서 말할 줄도 알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시간을 좀 벌기 위해 소은이는 꼼짝 말고 그 방에 있으라 하고, 일단 소미만 데리고 옆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소미에게 사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대강 듣고, 소은이가 동생이라고 뭐든 네 맘대로 하려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 일러주었다. 그리고 사실 소은이가 한 말이란 거 다 안다, 소은이가 솔직하게 말하게 하려고 한 것이지 널 때릴 생각은 없었다 말하니 그제야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소은이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네가 한 걸로 해달라고? 한 거면 한 거지, 한 걸로 해달라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냥 언니 맞는 거 싫으니까…”
난 그때부터 목소리 쫘악 깔았다.
“소은이! 엄마 봐. 엄마 눈 똑바로 봐.…… 솔직히 말해. 솔직히 말할 기회는 이제 한번만 줄 거야.”
“그럼 솔직히 말하면 안 때릴 거예요?”
이젠 아주 거래를 하려고 들었다.
“그건 엄마도 모르겠어.”
“그럼 나도 엄마가 솔직히 말하면 안 때린다고 할 때까지 솔직히 말 안할 거예요.”
나는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틈을 주지 않고 종아리 조금 아래를 아프게 딱 한대 때렸다. 요것이 지금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쫘악 깐 목소리를 흩트리지 않고 말했다.
“마지막 기회야 소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 말고 솔직한 말만 해.”
“엉엉…… 엄마 잘못했어요. 사실은 제가 그랬어요.”
사실 이러자고 처음 방에 들어간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간 애들한테 너무 무섭게 굴었나? 그래서 애들이 무조건 혼날까봐 거짓말부터 둘러댄 걸까? 누가 했냐고 추궁하듯 시작한 게 잘못이었지? 하며 마음속에 수많은 반성의 넋두리가 교차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일도 많다. 사사건건 모든 걸 들추어내어 바로 잡고 너무 피곤하게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언제고 한번쯤 소은이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란 예감은 하고 있었다. 소은이라서가 아니라 소미도 예전에 빤히 알고 있는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한 걸 된통 혼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소미는 그 이후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한다. 그게 야단 안 맞고 빨리 마음 편해지는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소은이 같은 경우는 작은 아이의 특성(악으로, 깡으로, 내 멋대로)이 더해져서 모든 것이 소미보다 참 만만치가 않다.
“엄만 처음부터 이렇게 매로 때리면서 야단칠 생각은 없었어. 그냥 가볍게 ‘누구한테도 그런 말하면 안 된다’하고 말로만 하려고 했단 말이지. 그런데 소은이가 생각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처음부터 그냥 ‘제가 그랬어요, 엄마.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하면 되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