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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 왕자'가 오다

M.미카엘라 2005. 3. 11. 14:44
 

“왕자님. 말 태워 드릴게요. 자 여기 타세요.”

 

우리 집에 왕자가 왔었다. 다섯 살짜리 이 왕자의 이름은 박기찬. 그야말로 ‘기찬 왕자’다.  기찬이는 생후 3개월 된 여동생이 탈장으로 수술을 받기 위해 엄마와 병원에 간 사이 이틀 우리 집에 맡겨졌다. 우리 뒷동에 살지만 본래 기찬이네와 우리는 약 5년 전 한 군인아파트에서 같이 산 적이 있다. 그땐 기찬이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비로소 엄마 안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헤어진 걸로 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렇게 저렇게 연락을 주고받고 만났으니 오래된 이웃이다.

 

소미와 소은이에게 기찬이는 아주 귀여운 동생이다. 더구나 인형만한 동생 하은이까지 있는 그 집에 두 아이는 자주 가지 못해서 안달이다. 내가 기찬엄마가 힘들까봐 기찬이를 데려와서 놀라고는 하지만 자주 가지 못하게 한다.

 

“엄마, 동생 낳아줘. 기찬이 같은 동생.”

“엄마, 하은이처럼 쪼꼬만 동생. 아후~귀여워.”

요즘은 두 아이가 가끔씩 어찌나 동생 타령인지 모른다.

“엄마, 내가 우유 먹이고 놀아주고 침 닦아주고 할 거예요.”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 손잡고 다닐 거구, 책도 읽어줄 거예요.”

그러면 난 거두절미하고 “할머니 앞에서만 이런 말 하지 마. 응?”한다. “왜요?”하고 묻는데 난 그냥 환한 웃음으로 때웠다. 

 


 

두 아이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기찬이를 돌보는지 소미 소은이 없이 내가 기찬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밥과 간식만 챙겨주면 알아서 저희들이 씻겨주고 이 닦아주고 책 읽어주고 노래 불러주고 어깨에 빨강보자기 둘러주고 종이칼 만들어서 내복고무줄 안에 푹 찔러 채워주고 칼싸움도 해주었다.

 

소은이는 어디 나가서 놀고 싶고 친구 집에 가고 싶어도 참는 눈치고, 졸린 걸 참고 늦는 아빠를 기다리는 기찬이를 위해 놀아주었다. 얼마나 갸륵한지 심지어는 같이 있으면서도 자기 혼자 뭘 따로 하는 걸 미안해할 정도였다.

“소은아, 너무 기찬이하고 계속 놀아줘야 한다는 부담 갖지 말어. 괜찮아. 기찬이는 이제껏 집에서도 혼자도 잘 놀았잖아. 다섯 살이나 되었는데 뭘. 하고 싶은 거 조금씩 해도 돼. 친구 집에 다녀오고 싶으면 그렇게 해. 엄마가 있잖아. 소미언니도 곧 올 거구. 소은이가 계속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기찬이가 자주 놀러오는 게 부담될지도 몰라.”

“그래도 미안해서…. 친구 집엔 안 갈래.”

 

소은이가 그런 면이 있다. 더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큰 언니오빠들한테는 빡빡 대들고 덤비는데, 한 살이라도 어린 동생에겐 장난감 다 빼앗기고 퍽퍽 얻어맞아도 속수무책 당하고 울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동생이잖아” 그 대답뿐이었다. 언젠가는 딸이 셋인 내 친구 집에 갔다가 그 집 네 살짜리 막내가 계속 소은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마다 뺏고 못 놀게 하니까, 너무너무 분통 터져하다가 제 딴엔 강력한 의사표시 한다는 게 내 친구에게 달려가 “이모, 승이 화~악 꼬집어주고 싶어요”하고 하소연하더란다.


“기찬아, 책읽어줄게. 근데 누나가 한글을 배웠긴 배웠는데 아직 잘 모르는 것도 있고 빨리 못 읽어. 그거 니가 이해해주고 들어, 응?”

설거지를 하는데 이런 소리가 방에서 들렸다. 참 가슴이 찡했다. 목소리에 사랑과 정성이 얼마나 깊게 배어있는지 나는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소리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려고 설거지하던 손을 잠시 멈추기도 했다. 친동생이 아니면 어떤가. 가까이 사는 다른 집 동생에게 저렇게 잘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하긴 기찬이 요 녀석이 누나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만한 아이기도 하다. 누나 누나 잘 따르고, 아무거나 줘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무엇보다 또래에 견주어 거친 점이 거의 없으며, 제 집에서나 우리 집에서나 하루 종일 데리고 있어도 징징대거나 떼를 쓰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이따금 엄마가 보고 싶어도 크게 내색을 안 하고, 밤에 누나들이 먼저 잠들면 참다 참다 방에서 혼자 우는데, 내 가슴이 다 아파서 하룻밤 데리고 자려다가 포기하고 제 아빠를 불렀다. 기찬이 엄마 아빠는 가장 길러주고 싶어 하는 덕목이 ‘용기’라고 하는데, 얌전하고 감수성이 강하다고 용기마저 없는 건 아닌 거고 가지고 태어난 성정이 본디 그런 아이니 인위적으로 크게 바꾸는 일은 어렵지 싶다.

 

“엄마, 나 이 바나나하고 요구르트 기찬이 주고 싶어요. 그리고 조금만 놀다가 이모 힘드니까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놀게요.”

소은이는 오늘도 제 먹을 간식을 나눠서 챙겨들고 집을 나서려고 한다.

“기찬이 유치원 갔잖아. 너보다 늦게 올 걸. 3시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자기 친동생에게 잘하기는 쉬워도 다른 집 동생에게 그렇게 잘 하기 쉽지 않은데 우리 소은이 참 이쁘고 훌륭하다 하며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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