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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바쁘다

M.미카엘라 2002. 11. 4. 09:17
소미와 소은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온 지 30분 정도 되었을 때 누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누가 올 사람이 없는데… 이러면서 문을 여니 생각지도 않은 소미 친구 L이 서있었다. L의 등뒤에는 소은이네 반 O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아직도 유치원 가방을 그대로 맨 채.

L은 소미와 같은 유치원 같은 반이지만 생일이 빠른 다섯 살이다. 집도 여기 군인아파트에 사는데 우리 집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동에 산다. 걸어다니기에 나쁜 길도 아니고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늘 차가 많이 다니기 때문에 나는 소미 혼자 L네 동이 있는 놀이터까지 가게 하는 일이 없다.

"엄마한테 말할려고 했는데요, 엄마가 집에 없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말도 못하고 그냥 왔어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L과 O는 내게 변명하듯 가방을 매고 우리 집에 올 수밖에 없었던 형편을 설명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럼 사이좋게 놀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가야 한다. 알았지?"

지난번, 가방을 맨 채로 처음 우리 집에 왔던 L에게 내가 좋게 나무랐던 일이 있었다. 엄마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친구 집에 오면 엄마가 널 얼마나 찾으면서 걱정하시겠냐, 소미와 놀려고 온 건 좋은 일이고 고마운 일이지만 다음부터는 엄마에게 다녀왔다고 인사드리고 꼭 소미네 가도 되냐고 여쭤보고 오도록 해라, 이제부터 그냥 우리 집부터 오면 아줌마가 화낼 거다… 등등.

그리고 또다시 가방을 매고 이렇게 왔는데 나는 더 이상 아이를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걱정할까봐 L의 엄마와 O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 두 엄마 모두 심상한 목소리로 그러냐고, 그럼 좀 놀게 해서 보내라고 했다. 크게 놀라지도 염려하지도 않았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이들보고 어른에게 허락을 구하고 나서 어딜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오라고 한들, 집에 그렇게 말씀드릴 어른이 없거나 그런 말을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계신다면 내가 아무리 가르치는 말을 해도 공염불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두 엄마의 반응에 꽤 당황했다. 그리고 곧 내가 좀 유난한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통제하며 벌벌 떠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아이들이 아직 고작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엄마들은 '이제 클 만큼 컸다, 그 정도 혼자 다니는 건 문제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한편, 군인아파트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 민간아파트보다 훨씬 이웃간에 교류가 많다보니 '이 애가 뉘 집 아이고 집은 어디다'라는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한두 건너 집에 있기 마련이고, 그런 면에서 아이들이 눈앞에서 논다면 서로 봐주는 셈이 되는 편이다. 그런 공동체의식이랄까, '좀 안전하고 특수한 울타리'라는 느낌이 드는 군인아파트의 속성상 엄마들이 걱정이나 염려를 좀 덜하는 편인 건 사실이다.

어쨌든 두 아이는 오후 3시쯤 우리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놀다가 5시쯤 내가 돌려보냈다. 그러니까 네 살, 다섯 살 두 아이는 8시 반에 유치원 가느라 집을 나와서 9시간 가까이 밖에서 지냈다. 우리 집에 아이들이 있는 동안, 나는 어쩌나 보자 하면서 두 엄마 모두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4시쯤 되니 O의 엄마가 평화로운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 우리 O가 '혹시' 그 집에 갔느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L의 엄마는 5시까지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영국에 사는 친구 M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의 수다는 종종 대륙을 뛰어넘어 오래 이어지기도 하는데, M은 전화 통화 중에 자주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야 한다. 또 데리고 와야 한다, 혹은 어딜 데려다 주러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 친구의 큰딸은 우리 나이로 여덟 살이고 둘째딸은 생일이 빠른 다섯 살로 소미와 친구다.

내가 물었다.
"아휴, 넌 맨날 그렇게 애들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그러느라 하루 다 가겠다. 거긴 도대체 언제까지 그래야 되니?"
"여긴 애들 둔 집은 다 그래. 안 그러면 부모가 혼나! 집 앞 도서관에 가는 것도 어른의 동행 없이 아이들끼리 가면 안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우리 이웃집에 이란 사람 아이들이 놀러왔었는데 그 아이들이 컸기 때문에 믿는 마음으로 '내가 요 앞 가게에 잠깐 다녀와도 잘 지낼 수 있겠니? 괜찮겠니?'하고 물었거든.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잠깐 가게에 다녀왔지. 그런데 내가 나가고 난 후 그 옆집 아이가 우리 서이(M의 딸)한테 '너네 엄마 말야. 사실 이렇게 우리들끼리만 두고 혼자 외출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사실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러더래. 기가 막히지 않냐? 애들까지도 이래. 여긴 아이들끼리 집에만 두고 잠깐 슈퍼에 갔다오는 일조차도 원칙적으로는 안 되는 나라야. 그게 당연해서 불편하다거나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아이 기르는 사람들의 일상이야."

어린이 옆에 언제나 어른이 동행하는 일은 당연하고 그게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법적인 제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독립적인 사고방식으로 기르고 일찍 독립시키고 스스로 판단하고 일하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게 하는 교육을 건국이래 내내 해왔을 나라에서 그렇게 아이들을 과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아이들 보호가 철저하다보니 유괴 사건 같은 건 거의 일어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실종사건이나 어린이관련 피해사건은 대대적인 보도감이고 전국을 뒤흔드는 뉴스라고 했다. 우리 나라는 한해 실종 어린이 수가 몇 백 명을 넘는데도 경찰력으로 찾는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찾는 루트도 일원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소식을 얼마 전 들었다. 참으로 수다 끝에 마음이 착잡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로 힘을 얻는 건 아니다. 요즘은 자아와 자기개발에 대한 욕구가 강한 엄마들이 아이가 조금 크면 아이를 빨리 떼 놓고 자기시간을 갖고 싶어한다. 특별히 뚜렷한 일을 가진 엄마들이 아니라도 요즘 엄마들이 좀 바쁜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려다보니 놀이방이나 어린이집에 보내는 연령도 점점 더 빨라지고 문자교육이든 뭐든 조금 빨리 시작하려고 한다.

퍽 하면 잘 넘어지고 잘 흘리면서 먹고 말도 잘 못하던 아이가, 안아주지 않아도 좀 먼 거리를 잘 걷게 되고 스스로 혼자 먹을 수 있고 집 앞에서 놀다가 집을 잘 찾아 들어올 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다 컸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요즘 엄마들이 때때로 '분리와 독립'의 시기나 방법을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한 집에 한 둘씩 밖에 안 낳는 아이들을 과잉보호한다는 비난 속에서도 독립성과 창의력, 자유성을 길러준다는 생각으로 너무 아이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는 생각이다.

소미 같이 어릴 때는 행동반경이 좁아서 밖에서 논다 해도 놀이터나 친구 집 정도가 되겠지만, 아이가 어딜 가는 일에 대해 어릴 때부터 좀 무신경했다면 점점 더 클수록 아이들을 (좋은 의미에서) 통제하기는 힘들어질 게 분명하다. 그때 가서 '넌 공부도 안 하고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어디는 가지 마라, 어딜 가면 간다고 말하고 몇 시까지 온다고 말하고 다니지 못하겠냐, 지금부터 몇 시가 네 통금시간이니 지키지 못하면 혼날 줄 알아라' 이렇게 닦달을 한들 그게 아이들 귀에 들어올까 싶다. 우리 엄마가 왜 갑자기 간섭이실까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유치원이든 학교든 일단 다녀오면 부모나 그 밖의 책임 있는 어른들과 눈도장을 찍고, 어딜 다녀오겠다고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는 일은 기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습관을 들여준 후 어느 정도 크면 스스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요즘 너무나 바쁜 엄마들은 핸드폰으로 학교에 다녀온 자녀들과 '귀도장' 찍고 그 모든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만,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나 부모의 부탁을 받은 어떤 어른이라도 기다렸다가 챙기는 일은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른 엄마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L이나 O 엄마를 비난하려는 뜻은 없다. 단지 L이 가방을 맨 채, 혹은 집 문은 열려있어서 가방을 두고 왔다 할지라도 일단 L이 우리 집 문을 열면 나는 가슴이 좀 답답해진다.
"엄마는?"
"엄마 없어요. 춘천 갔어요. 그래서 말 못하고 그냥 놀러 왔어요. 근데 집에 가방은 두고 왔어요."
"오빠는? 오빠 만났니?"
"오빠도 없어요. 학교에서 안 왔나봐요."

엄마한테 말 안하고 왔으니 돌아가라고 할까봐 겁을 내는 아이를 보면서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들어와. 그런데 왜 외투는 벗고 왔어? 안 추웠니? 거기서부터 걸어오려면 꽤 쌀쌀할 텐데. 그리고 금방 해떨어지잖아. 이따 갈 때는 아줌마가 데려다 줄게…… 출출하겠다. 소미랑 뭘 좀 줄게 같이 먹어 응?"

조금도 불쌍할 까닭이 없는 행복한 집 아이인데 그날 따라 날씨 탓인지, 외투 없는 차림 때문인지 L이 좀 가여웠다. 흠, 이런 소리를 L의 엄마가 들으면 화낼지 모르겠다. 화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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