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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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손의 솜씨

훌륭한 일기

M.미카엘라 2005. 9. 14. 23:08
 

“엄마, 나도 훌륭한 일기를 써보고 싶어요.”

“어떻게? 어떤 게 훌륭한 일기야?”

“언니처럼 이~렇게 공책 끝에까지 다 쓰고 싶어요. 근데 칸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들어요.”

“손손은 아직 반만 쓰는데도 훌륭해. 그림일기 할 때인데 글로만 표현하잖아. 그런데도 너무 잘 써. 그러니까 쓰기 어려운데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돼. 언니처럼 생각주머니가 더 커지면 저절로 쓰고 싶은 말도 많아지고 길게 쓰게 될 거야. 알았지?”

“그래도 난 훌륭하게 쓰고 싶어요. 오늘 한번 쓸 거예요. 뒤에까지 넘어갈지도 몰라요. 진짜 훌륭하게.”


길게 쓴다고 잘 쓰는 일기 아닌데 결국 소은이는 오랜만에 엉덩이 착 붙이고 진득하게 쓰는 눈치였다. 한참을 드문드문 모르는 글자 물어가며 쓰더니 곧 일기장을 내게 내민다. 명절 앞두고 시의 적절한 글감이 좋다. 새 글 못쓰고 다른 일에 바쁜 나 대신, 요즘은 소은이가 즐거운 일기로 이 게으른 엄마를 구해준다. 이제 엄마를 대신하여 자신의 성장일기를 슬슬 쓰기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곧 일기 공개는 어려워질 것이다. 아직은 일기 보여주는 걸 조금은 자랑스러워하니 또 한편을 공개한다.

 

 

 

 

9월 14일

제목: 송편

유치원에서 송편을 만들었다.

이상한 송편도 있었지만 예쁜 송편

도 있었다. 맛이 있고 재미있었다.

청소하기도 재미있었다.

집에도 가지고 왔다. 콩 넣은 것은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

는데 콩 넣은 게 제일 맛있

었다. 친구들이랑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하니까 더 재미

있었다. 너무너무 즐거운 하루

다. 너무 뿌듯했다. 사실

은 오늘이 제일 재밌는 하루

일 거 같다. 아주아주 재미

있었다. 사실 앞치마는

 

 

 

 

 

 

 

했다.

 

 

 

 

 

 

 

 

 

 

 

 

 

 

 

 

 

 

 

 

흠, 아주 ‘훌륭한 일기’다. 한쪽을 넘어갔으니.... 처음 일기를 내밀 때는 ‘아주아주 재미있었다’까지가 끝이었는데 ‘훌륭한 일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엄마 잠깐, 더 쓸 게 있어요”하고 쌔~앵 일기장을 가지고 방으로 가더니 ‘사실 앞치마는 못했다’ 요렇게 한줄 더 써넣어서 다음 쪽으로 넘겼다. 이윽고 ‘훌륭한 일기’는 완성되었다.

 

아이들 일기에 ‘재미있었다’ 빠진 일기 거의 보기 어려운데 오늘은 모두 다섯 번이나 나왔다. 그런데도 그게 상투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손손이 얼마나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어 했는지 손에 잡힐 듯 느껴져서 내가 다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일기가 더욱 사랑스럽게 읽힌다. 송편 만들던 시간을 생각하면서 일사천리로 써갈 때조차 또 재미가 나서 그렇게 많이 '재미있다'는 말을 썼는지도 잘 모르는 눈치다.   


일기에 나오는 송편은 식구들하고 나눠먹는다고 네 개를 봉지에 넣어서 들고 왔는데, 모양은 오물딱조물딱 가지가지이고 조금 꼬지지한 것까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한 입 맛보고 났는데 결국 손손이 이런저런 구실을 대서 다 먹어버렸다.


깨 송편: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내가 먹고~

콩 송편: 이게 사실 제일 맛있어서 언니 주려고 했는데 언닌 맛도 안 보고 콩은 싫다니 내가 먹어줘야지~

건포도 송편: 언니가 웬일로 건포도 송편도 안 먹지? 난 건포도는 별론데 그래도 열심히 만든 거니까 내가 먹어야지. 엄마, 엄마도 맛보세요.(내가 반쯤 베어먹었다)

밤 송편: (더 먹고 싶은 눈친데) 아빠도 드셔야 하는데…, 내가 열심히 만든 거 아빠도 맛보셔야 하잖아요.


“아빠가 오늘 부대서 저녁식사 하시고 일 더 하시느라 많이 늦으신대.”

“어, 그럼 이거 상할 텐데.“

“그래 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쉽긴 하지만 손손이 먹어라. 곧 추석이니까 송편 또 있어. 아빤 그거 드시면 돼. 작년에 손손이 유치원에서 만들어온 거 드셨잖아. 엄마가 잘 말씀드릴게.”

그래서 손손이 마지막 한 개도 먹어버렸다.


손손은 정말 오늘 하루 꽉 차게 보냈다. 너무너무 재밌게, 너무너무 맛있게, 너무너무 배부르게, ‘훌륭한 일기’까지 써서 너무너무 만족하게.

 

여러분들도 이번 한가위 더도 덜도 말고 딱 손손처럼 행복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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