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새집 신드롬 본문

사랑충전소

새집 신드롬

M.미카엘라 2003. 10. 8. 12:28
하늘이 높다. 여름을 지나 가을 초입까지도 그리도 비가 잦더니만 요즘에야 이제 우리 나라 계절을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에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한층 더 이뻐보인다. 아파트 단지 안에 서있는 은행나무들이 저마다 은행을 잔뜩 달고 있다가 수확을 맞으니 그 특유의 고린내가 문만 열면 진동을 하지만 그래도 '낙엽 타는 냄새만 가을냄샌가, 이것도 가을 냄새다' 하면서 견딘다.

군 밖의 집값이 비싸네 어쩌네 해도 요즘 한창 이사철임이 분명하고 여기도 역시 남편들의 이동이 많아 이삿짐을 실으려고 들어오는 차들이 많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소미 친구 한 명, 소은이 친구 한 명도 각각 곧 비슷한 시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것 같다. 그중 소미 친구가 얼마 전 놀러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동하야. 이사한다면서? 엄마가 그러시더라."
"네."
"그런데 어쩌니. 소미랑 이렇게 잘 놀았는데… 참 섭섭하다."
그 다음 대답은 없다. 그랬더니 냉큼 소미가 말을 이었다.
"동하 너 나랑 헤어져도 안 섭섭하구나. 이사하는 게 좋아?"
"응."

야, 정말 어린애니 거짓말은 안 하는구나 싶지만, 그래도 내 마음까지도 좀 서운하다 싶었다.
"정말? 너 이사가고 싶니? 의외다. 이렇게 정든 친구들도 많은데 그런 마음이 들다니."
"왜냐면요. 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요. 여긴 13평밖에 안 돼서 너무 답답해요."


세상에나! 일곱 살 짜리 어린아이의 이사가고 싶은 이유가 이런 거라니 너무 놀랍다. 물론 혼자 스스로 생각해낸 말은 아닐 거라 믿는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어찌 귀에 담아두었다가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한참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었다.


그 후 소미는 공교롭게도 집을 사서 이사한 널찍하고 좋은 고모네 집에서 하루밤을 잤다. 내가 사이판 여행을 했을 때 남편이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재운 모양인데 제 눈에도 참 좋아 보였나보다. 약 한 달 전쯤에도 영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내 여고시절 친구네 집에 갔다가 부러운 눈초리로 제 친구의 이층 침대를 보고 온 터였다.


거기다가 동하가 그런 소리를 했지 하니 소미는 어느 날 우리도 이사가자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크고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도 지금보다는 큰집에서 살 수 있지만 아빠의 부대 때문에 부대 가까운 군인아파트에 사는 거다, 모든 식구들이 한집에서 오손도손 재미있게 사는 게 행복한 거지 꼭 큰집만 있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다, 앞으로 우리도 그런 집에서 살 날이 있을 거다 하고 말을 했다. 그런데 소미는 조금 이해하는 듯하다가 또 어느 날 새집으로 이사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서 슬슬 내 염장을 질렀다.


"그러면 안 되겠다. 고모에게 전화해서 거기서 소미가 살게 해달라고 말할 수밖에. 고모네 집은 넓으니까 소미 하나쯤 길러주시는 건 문제가 없을 거야. 네가 좋아하는 도연이(사촌)랑 같이 살게 될 테니 너무 좋겠다 그치? 이제부터 아빠, 엄마는 소은이하고 살게."
"엄마, 난 우리 집이 좋아. 소미 언니는 고모네 가고 난 아빠, 엄마랑 살 거야."
소미를 힐끗 보니 벌써 제가 좀 실수했다 싶은 표정이 역력했는데, 거기다 소은이가 촉새처럼 톡 튀어나와 거드니 소은이가 미워죽겠다는 표정까지 더해져 나는 속으로 킬킬 웃음이 나왔다.


"아니예요. 엄마. 그래도 엄마, 아빠랑 사는 게 좋아요."
"소미는 아빠, 엄마보다 새집이 더 좋은 거 아니었어? 엄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예요…. 전 그냥 아빠, 엄마 있으니까… 우리 집에서 살래요."
한 마디만 더 몰아 부쳤다간 곧 울어버릴 판이라 거기서 그쳤다. 모르긴 몰라도 다시는 새집 타령을 안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지난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 때는 우리 식구는 미리 신청을 해서 행사장에 다녀왔다. 집 가까운 곳에서 행사를 했기 때문에 비오는 날씨에도 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국군의 날 행사가 뭔지를 잘 모르니 아이들에게는 그냥 "노무현 대통령 직접 보러 갈래?"하고 물었더니 좋다고 펄펄 뛰었다. "난 대통령 맨날 텔레비전에서밖에 못 봤는데 증말 신난다"하면서. 나는 "아빠가 군인이라서 새집에서 사는 일은 어려워도, 이렇게 직접 대통령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있는 거야 알았지?"하면서 내심 뻐기는 말을 하는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애들이 대통령은 어디 있냐고 성화를 하는데 웬 걸 대통령은 다시 텔레비전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본부석이 워낙 멀고 우리가 뭐 눈앞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도 아니어서 그냥 여전히 대형 멀티비전으로 보여주는 대통령을 볼 수밖에 없었다. 행사에 참가한 군부대 장병들을 차로 사열하는 대통령을 한 100미터 좀 못 미치는 곳에서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게 직접 본 전부였는데 소미는 시시하다고, 얼굴도 자세히 못 보았다고, 자기가 손 흔들어주는 것도 못 봤을 거라고 난리다.


어쩌랴! 이제 대통령을 비판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해도 대통령의 권위란 게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직접 보니 장난이 아닌 것을. 하도 사람들 사이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대통령이라 경호원들이 애를 먹는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적이 있긴 한데 그날의 행사가 또 그런 차원의 행사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멋진 군인 아저씨들의 절도 있는 태권도 시범과 행렬 장관, 공군의 화려한 에어쇼는 아주 인상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유치원을 빼먹는 일을 탐탁지 않아 했던 소미에게 "오늘 유치원 갈 걸 그랬나?"하고 떠보았더니 "아니예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괜찮아요 엄마. 친구들은 이런 거 진짜로 못 보잖아요"한다.

"그래. 소미야, 아빠가 군인이니까 좋지? 아주 널찍하고 좋은 새집에서는 못 살아도. 그치?"
"네."
나도 참! 그만해도 될 것을 은근히 집요하다. 히히!



'사랑충전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칙주의자 맏이  (0) 2003.12.22
럼스펠드 나와!  (0) 2003.11.18
여왕과 왕비  (0) 2003.09.01
주력상품을 바꿔?  (0) 2003.07.04
빨간 자전거  (0) 2003.06.21